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쑤 Feb 22. 2016

바르셀로나 출신의 조뿌라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3


함께 절뚝이며 에스테야까지


5일 차, 걷던 중 초반에 조뿌라라는 바르셀로나에서 온 남자를 만났다. 37살의 그는 긴 휴가를 내고 순례길을 걸으러 왔다고 했다. 삼촌과 얘기하는 것 마냥 편안하게 대화를 하며 걸었던 것 같다. 그러다 조뿌라는 좀 앞서가고, 나는 오늘 골반 쪽 고관절이 너무 아팠던 탓에 조금 천천히 가겠다며 헤어졌다. 



해가 뜨기 전과 서서히 해가 뜨기 시작할 때의  하늘색은 이렇게 아름답다.


스페인 가족들의 뒷모습



그런데 오늘 목표했던 마을로 들어가기 바로 전 마을에서 조뿌라를 다시 만났다. 걷는데 저 멀리 벤치에서 쉬고 있는 그가 보였던 것. 조뿌라는 중간에 다리를 다쳐서 아까 같이 걷던 스페인 친구들과 헤어졌다고 했다. 둘 다 다리 상태가 안 좋아서인지, 느릿느릿 천천히, 자연스럽게 남은 7킬로를 함께 걷게 됐다. 


조뿌라와 굉장히 많은 대화를 나눴다. 좋아하는 가수, 노래를 추천해줘서 번갈아 가며 틀고 듣기도 하고, 책 얘기, 영화 얘기까지 했다.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감독과 여배우가 스페인 사람이다. 그게 그와 길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던 것 같다. 내가 영화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작품 하나를 얘기하면, 그가 다 알고 맞장구를 쳐주고 그의 다른 작품 이야기를 꺼내는 식이었다. 여배우 ‘페넬로페 크루즈’로 대화 소재가 넘어갈 때도 역시 그녀의 작품들을 하나하나 얘기해보는 식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와중에 한국에서는 알 수 없었던 스페인에서의 페넬로페 크루즈의 평판 역시 들을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같이 영화를 하는  배우마다 사랑에 빠진다나 뭐라나. 


그와 얘기하는 도중에 실수를 하고 말았다. 대학교 1학년 때 교양으로 초급 스페인어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 나는, 아주 간단한 스페인어 회화가 가능했다. 정말 일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그런 스페인어를 조뿌라에게 한 마디씩 하며 장난을 쳤다. 그때 조뿌라가 자기는 카탈루냐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 내가  별생각 없이 ‘카탈루냐가 스페인 아니야?’라고 했던 것.




카탈루냐? 카탈루냐 지방?


카탈루냐는 1714년에 스페인에 병합된 나라다. 바르셀로나를 거점으로 한 카탈루냐 지방에 카탈루냐 인들이 모여 살고 있으며, 언어도 스페인어와 유사하지만 분명 다르다. 20세기 들어 자치권을 획득한 적도 있지만 스페인 내전 이후에 프랑코 정권에서 다시 자치권을 잃고 공식적으로 카탈루냐어를 사용하는 것도 금지되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문화적인 면에서 많이 박해를 받았던 것. 하지만 카탈루냐 사람들은 여전히 스스로를 스페인 사람이 아니라 ‘카탈루냐인’이라고 자각한다. 병합이 되고, 행정상으로는 스페인의 한 지역일 뿐이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스페인과 합병이 된 것도 몇 백 년이나 되었다지만, 그동안에도 카탈루냐 지방은 자체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다고 하니 이토록 민족의식이 뚜렷한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프랑코 정권 때 문화적으로 압살 당한 것은 물론이고, 카탈루냐의 많은 사람 역시 희생당한 것도 이러한 자의식에  한몫하지 않았을까. 조뿌라가 시작이었지만, 조뿌라뿐만이 아니었다. 순례길을 걸으며 ‘나는 카탈루냐인 이야’라고 말하는 순례자들을 굉장히 많이 만났다. 


스페인 친구들에게 들으면 이들과는 또 다른 이야기를 한다. 카탈루냐 지방은 스페인 내에서도 가장 부유한 지역이라고 한다. 그만큼 스페인에 상당한 양의 세금을 납부하고 있으며, 그 세금들이 카탈루냐만을 위해 쓰이는 게 아니라 상대적으로 빈곤한 지역을 위해 쓰인다. 이런 경제적인 이유가 그들의 독립 주장에  한몫한다는 게 스페인 친구들의 말이었다. 


난 이들 중 누가 옳다 그르다 말할 만큼의 지식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자신의 민족성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는 나의 카탈루냐 친구들에게 굳이 토를 달고 싶지는 않았다. 이건 단순히 경제적 이유에서 기인한 게 아니라 식민 지배의 아픔을 몇백 년째 겪고 있는 민족의 설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더 조심하고 싶었다. 조뿌라 덕분에 스페인과 카탈루냐의 관계와 이들의 역사에 대해 찾아보고, 옛날보다는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정말 이들의 내부로 들어가지 않는 이상, 양측의 입장 모두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하리라. 


나는 조뿌라에게 바로 정말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조뿌라는 환하게 웃으며 괜찮다고 하더니 한마디 덧붙였다. 


나는 스페인에 살고, 스페인 사람들도 내 친구야. 난 그들을 정말 사랑해.
그냥 나는 내가 카탈루냐 사람이라고 생각할 뿐이야.




바르셀로나에서 다시 한 번 만난 조뿌라


조뿌라는 아킬레스건염이 도져서 중간에 다시 바르셀로나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가 돌아가는 날은 보름달이 떴던 한가위, 2015년 개기월식이 일어났던 날이었다. 그날 밤 알베르게 바깥에서 그를 비롯한 여럿 친구들과 한참 수다를 떨었는데, 알베르게 주인이 문을 닫겠다며 강제로 숙소에 밀어 넣는 바람에 들어와야 했다. 조뿌라와도 작별 인사를 하고,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알베르게로 들어가기 전, 잠깐 뒤돌아 하늘을 쳐다봤었다. 달이 참 밝았다.


조뿌라는 돌아갔지만, 일주일에 한 번 씩은 꼭 ‘잘 걷고 있냐’며 안부 연락이 왔다. 그리고 바르셀로나로 오면 꼭 연락하라고 강조했었다. 그때마다 신세를 져도 되는 걸까, 괜히 귀찮게 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었는데 결국 조뿌라를 바르셀로나에서 다시 만났다. 


조뿌라의 직장은 놀랍게도 고딕지구에 위치한 카탈루냐 정부청사였다. 카탈루냐 정부청사는 시청과 마주 보고 있었다. 독립을 주장하는 단체와 주 정부의 시청이 마주 보고 있다니. 참 묘했다.



어마어마했던 사그라다 파밀리아(성가족 성당)
사그라다 파밀리아(성가족 성당)


조뿌라는 바르셀로나 이곳저곳을 안내해줬다. 사실 그와 만나고 나서도 자기 집에서 자도 된다고, 가족들이 다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그를 100% 신뢰하지 못했었다. 나는 여행자고, 게다가 혼자였기 때문에 언제나 경계를 늦추면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 얼굴을 보면 이 사람에 대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단순한 예쁨을 떠나, 얼굴에 선함이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조뿌라가 그런 사람이었다. 조뿌라는 여행지에서 대뜸 자기 집 가서 술 먹자고 들이대는 남자가 아닌, 순례길에서 만난 '친구'였다. 사실 나한테 들이대기에는 나이도 삼촌뻘이었다고.. 하지만 그의 집에서 머물기로 한 건 이러한 이유가 아닌, 그가 해줬던 말들 덕분이었다.


"아참, 친구들 온댔지? 내일 온댔나? 걔네들도 전부 우리 집에서 자도 돼. 다 오면 좀 좁겠지만 방 하나 줄게, 거기서 다 같이 자!" 

"내가 너무 가볍게 말했나? 나야 가족들이 다 있는 내 집이니 네가 오는 건  상관없어. 그런데 네 입장에서 여기는 타지고, 우리는 모두 너한테 타인이야."

"전적으로 결정은 네가 하는 거야. 무서울 수도 있지, 이해해."


좀  사람을 믿기로 했다. 벌써 여행 두 달 째였다. 그간 느낀 건, 마음을 열수록 여행이 더 즐거워진다는 거였다. 그래, 가자! 한마디를 하고 조뿌라를  따라나섰다. 그의 집은 고딕지구에서 지하철을 타고 몇십 분만 가면 되는 외곽 쪽에 위치해 있었다. 


역시나 내 걱정들은 전부 기우였다. 그의 가족은 나를 따뜻하게 맞아줬고, 아직 순례길의 향수에 젖어있던 나를 위해 길에서 먹었던 것과 똑같은 스페인식 오믈렛을 만들어 주었으며, 방 하나를 통째로 빼서 편하게 묵을 수 있도록 배려해줬다. 정말 오랜만에 알베르게도, 호스텔도 아닌 나 혼자만의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아침에 조뿌라는 출근을 해야 해서 일찍 나갔고, 나는 집에서 여유롭게 좀 더 머물다가 그의 가족들과 인사를 하고 호스텔로 향했다. 그 날은 유럽 각지에서 교환학생을 하고 있는 한국 친구들과 다 같이 그 호스텔에서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조뿌라의 가족들은 나가려는 날 만류하며 친구들도 집에 머물러도 된다고 했지만, 친구들까지 함께 신세를 지기에는 너무 미안해서 그럴 수 없었다. 다음날 순례 증서를 조뿌라 집에 두고 오는 바람에 그에게 증서를 가져와달라고 부탁해서 귀찮게 한 건 함정. 하지만 덕분에 그의 직장 앞에서 그를 한 번 더 만났고, 정말 그와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남들이 다 좋다던 바르셀로나가 난 그저 그랬었다. 티켓 예매를 못해서 가우디의 성가족 성당, 구엘 공원 내부 입장을 못했고, 그 유명한 몬주익 분수쇼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바르셀로나를 떠날 무렵에 입이 삐죽 나와있었다. 하지만 지금 ‘바르셀로나’라는 단어를 들었을  떠오르는   많은 바르셀로나의 관광지들이 아니라 조뿌라와 그의 가족과 함께 보낸 시간인  같다. 바르셀로나는 이것만으로 충분하다. 좋은 기억들을 안겨준 조뿌라-땡큐!

매거진의 이전글 날 일으켜주는 것도 사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