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4
나의 순례길 동행자들, 그러니까 일명 '까미노 패밀리'를 처음 만난 건 로그로뇨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로그로뇨로 가기 전 너무 힘들어서 목이라도 축일 곳을 찾고 있을 때 조그마한 마을이 나타났다. 거기에 작은 바를 가서 점심 겸 먹어야겠다 싶어 이것저것 시키고 시원한 콜라를 먼저 마시고 있었다. 맞은편 테이블에 세 사람이 보였다. 신기하게도 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지만 너무 피곤해서 먼저 인사하거나 다가가지 못하고 그냥 밥만 먹고 다시 길을 향했다.
그런데 길을 걷다가 이들을 또 마주쳤다. 자연히 아까 바에 있지 않았냐, 이름이 뭐냐는 식의 대화를 나누다가 로그로뇨까지 함께 걷게 됐다. 워렌, 로레타, 그리고 로리 셋은 팜플로나부터 같이 걸어온 꽤나 오래된 길 친구였다. 거기에 오늘은 브라질에서 온 에릭까지 합세, 걷는 내내 함께 이야기 꽃을 피웠다.
아무튼 이렇게 처음 만난 날, 우리 다섯은 기나긴 길을 걸었다. 사실 로그로뇨까지 가는 길이 굉장히 힘들었다. 다름이 아니라 찻길의 연속이었기 때문. 나와 에릭이 앞서 걷고, 셋이 조금 뒤쳐졌다. 가는 도중의 에릭의 러브스토리도 듣고 굉장히 재미있게 걷느라 이들이 뒤돌았을 때 안 보일 지경까지 된 걸 눈치채지 못했다. 에릭이 "그냥 믿어보자"라고 말하자 왠지 이들과 텔레파시가 통해 우리를 찾아올 것 같았다. 로그로뇨에서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으니까, 어쨌든 만날 수 있겠지? 하고 가볍게 생각했는데 이렇게 헤어져버린 뒤로 에릭과 나만 같은 알베르게를 쓰고 이들을 로그로뇨에서 보지 못했다. 작은 마을이었으면 다시 만나기 쉬웠겠으나, 로그로뇨는 까미노를 걸으면 지나는 상당히 큰 도시 중 하나다. 다시 이들을 못 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는 이들과의 인연이 이렇게 깊고 길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신기하게도, 이들을 다시 만난 건 이틀 뒤였다.
그날은 정말 말 그대로 혼자 걷는 날이었다. 버스를 타고 하루 코스를 건너뛰는 바람에 아는 사람도 없었고, 길 가다 마주치는 순례자들도 다 모르는 얼굴뿐이라 낯설었다. 이제 다시는 줄리아, 베네사, 피에르 등등을 못 본다는 생각에 좀 서운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마을을 넘고, 숲 길로 들어섰다.
숲은 정말 끝이 없었다. 경사가 급한 것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부드러운 능선이라서 더 힘들었다고 해야 하나. 끝없이 놓인 소나무를 따라 나 있는 길. 나무 때문에 햇빛도 들지 않았고 그래서 까미노를 걸었던 날 중에 가장 추웠다. 그냥 철저하게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싱가포르에서 온 제임스가 한 말이 생각났다. ‘이 길은 너에게 많은 인내심을 가르쳐 줄 거야.’ 그래. 이것도 시련이라면 시련이다. 이제껏 가파른 오르막길도 넘어왔는데, 이런 능선을 못 넘을 이유 따위는 없다. 좀 지루해도, 인내심을 갖고 한 발자국 씩 내딛다 보면 어느새 오늘 가야 할 마을이 보이리라.
이제껏 길을 걸으며 아무 생각을 안 할 때가 드물었다. 친구들 생각, 엄마 생각, 나에 대한 생각 등 갖가지 생각들이 뇌리를 스쳐가고는 했지만 오늘은 정말 아무 생각도 안 하고 그저 앞을 향해 걸어갔다. 몇 차례를 앉아서 과일을 먹고, 싸온 도시락을 까먹고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니 저 멀리 작은 마을이 보인다. 3킬로 정도만 더 가면 더 큰 마을이 있을 테지만, 그냥 여기 머물기로 결심했다. 피곤해서 더는 갈 수가 없었다.
가이드북에는 매트리스를 깔고 자는 성당을 개조한 알베르게라고 했는데, 들어가 보니 이층 침대가 즐비해있다. 다행이다. 저 구석 편한 곳에 자리를 잡으니 꽤 괜찮다. 좀 춥긴 하지만, 그래도 샤워실에는 따뜻한 물이 나와 견딜만했다.
뭔가를 살 만한 상점이 없는 마을이었다. 그래서 저녁에 알베르게에서 제공하는 순례자 메뉴를 신청해놓은 상태였다. 저녁 시간이 되어 터덜터덜 내려갔는데 누가 나에게 아는 체를 한다.
"Jo? you are Jo, right?"
워렌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워렌을 못 알아봤다. 처음 로그로뇨로 가는 길에 만났을 때는 여기서 다시 만날 줄은 몰랐다. 내가 버스를 타고 빨리 왔기 때문일 거다.
함께 저녁을 먹고, 로레타에게 내일 아침에 같이 가자는 제안을 받고 흔쾌히 수락했다. 이 날 기억 남는 것은 따뜻한 햇살 그리고 이 친구들. 그거면 됐다. 추운 알베르게에서 가디건을 입고 밖에 나가자 따뜻한 햇살이 날 감쌌다. 정말 감쌌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의 따스함이었다.
이때부터 우리는 같이 걷기 시작했다. 나중에 호주에서 온 제시까지 합세해 일행이 늘어났고, 우리는 스스로를 'Camino family'라고 불렀다. 그리고는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함께 걸었다. 물론 중간에 몸 상태가 각기 너무 달라서 헤어졌지만, 10월 19일에 산티아고에서 만나기로 약속했고, 정말 만났다.
처음, 사진을 찍어준 라스베가스에서 온 워렌. 처음에 워렌을 봤을 때는 국적이 아시아 쪽 일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어디서 왔냐는 나의 질문에, 워렌은 라스베가스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알고 보니 워렌은 미국에서 나고 자란, 그저 조부모님이 일본인일 뿐인, 그냥 미국 사람이었다. 대학 교수였는데 은퇴를 하고 여행을 다니고자 산티아고 순례길에 왔다고 했다. 워렌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낮고 굵직한 말투로, 라스베가스에서 왔다는 말을 하고는 했는데, 그 때문에 로레타와 내가 자주 워렌 흉내를 내며 놀렸다.
낮고 굵직하게 "I am Warren, from Las Vegas" 하며.
두 번째, 로리다. 아일랜드에서 온 로리는 런던에서 일을 하다가 아일랜드로 다시 이직을 하고 남는 시간 동안 까미노를 걸으러 왔다고 했다. 처음에는 냉철해 보여서 가장 다가가기 힘들었으나, 알고 보니 장난기도 많고 굉장히 정 많은 사람이었다. 가톨릭이었던 로리는 워렌 말에 의하면 그렇게 신앙심이 깊다고 한다.
세 번째는 리투아니아에서 온 로레타다. 자기주장이 뚜렷한 편이고 고집도 조금 있는 친구다. 그래서 그런지 엄청 똑똑하다. 리투아니아어가 모국어인데도 영어는 물론이거니와 러시아어에 중국어까지 못하는 게 없는 저널리스트다. 런던에서도 일을 하고, 베이징에서도 일을 했었다는,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보고픈 걸 보고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친구였다.
네 번째는 호주에서 온 제시. 국제학교 선생님이고, 지금은 캄보디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왜 까미노에 왔냐는 질문에 '그냥 재미있지 않냐'고 말하던, 멋진 친구! 나중에 프라하에서까지 만나게 됐다.
나보다 다들 나이가 한참 많았다. 최소 8살에서 많게는 30살 까지였으니까. 하지만 그래서 '친구'보다는 '가족'이라는 호칭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오늘 아침 7시, 해가 뜨기 전 걸었던 새벽 길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이들과 아침부터 같이 걷게 된 첫날 적었던 일기의 첫 구절이다.
난 게으른 편이라 출발이 다른 순례자들보다 늦은 편이다. 빠른 사람들은 6시 30분이면 채비를 마치고 길을 나서는데, 그때는 너무 어두워서 혼자는 무서울뿐더러 그렇게 서두르고 싶지 않아서 나는 아침을 먹고 느긋하게 8시쯤 나선다. 그런데 오늘은 로레타와 로리, 워렌과 함께 가기로 했기 때문에 조금 일찍 준비를 마치고 7시에 로비로 나갔다. 벌써 이들은 갈 준비를 마치고 가방을 메고 있었다. 함께 밖을 나섰더니 깜깜한 밤이다.
그런데 이런 놀라운 광경이 펼쳐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길을 나설 때는 해가 뜨기 직전이어서 하늘이 서서히 밝아질 무렵이다. 그런데 이 날은 아주 깜깜한 밤이었던데다가, 산골짜기에 있는 작은 마을이라 그런지 밝은 달 주위로 수많이 별이 보였다. 아, 너무 아름답다. 이렇게 많은 별들을 하늘에서 본 적이 없었다. 길을 걷다가 몇 번이고 친구들에게 ‘하늘 좀 봐. 저 많은 별 좀 봐.’하고 탄성을 질렀다. 몇 번이고 멈춰서 하늘을 바라봤다.
이 날은 많이 걷는 날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빨리 걸어왔다. 아마도 같이 걷는 친구들 덕이겠지. 사실 어제까지만 해도 조금 걱정을 한 게 사실이다. 얘들이 재미있게 걷는데 내가 방해하는 건 아닌가 하는 소심한 걱정들. 그런데 이들은 날 너무 편안하게 해준다. 웃음이 많고 끝없이 내게 말을 걸어주는 로레타, 무심한 듯 했지만 춥다며 자기의 장갑을 벗어서 나에게 건네주는 로리, 날 보면 활짝 웃으며 '내 손녀'하고 껄껄 웃는 워렌까지. 이들과 함께 걸으니 부르고스에 금방 도착했다.
행복한 날이었다. 함께 저녁을 먹으며 부르고스에서 하루 늦은 로리의 생일 파티를 했다. 각자 피자 한 판 씩 시켜서, 그걸 돌려가며 먹었는데 어찌나 웃긴지. 일명 'Pizza swap'. 자기가 나서서 로리의 생일 선물이라며 계산을 한 워렌도 멋졌고, 나의 밤부스틱 농담에 깔깔 거리고 웃어주는 로레타가 좋았고, 추위 때문에 귀까지 빨개진 로리가 좋았다.
우습기도 했다. 철저하게 길에서 혼자가 되어보자고 왔는데, 또 이렇게 친구를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과 함께 걸으며 좋아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낸다는 것 자체가 내가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행복들 중 하나구나를 느꼈다. 난 내 생각보다 사람을 더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때부터 '혼자가 되겠다' 혹은 '혼자가 될 수 있다'는 오만방자함은 버렸다. 별을 보며 걷던 감흥도 나누면 배가 된다. 하물며 피자도 여럿이서 나눠 먹으면 더 다양한 종류로 맛볼 수 있고. 힘들 때 내게 손을 내밀어 주고, 날 위해 가던 길을 멈춰주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리고 혼자였을 때보다 더욱 크고,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