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트라우마에 얽매이지마
아침에 일어나니 대학교 동창에게 연락이 와있었다.
내가 있는 서울로 올테니 카페 가서 대화나 하자고.
언니는 두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면 시간이 남고, 나는 백수니 둘의 시간이 딱 맞았다.
학창 시절부터 독서를 즐겨하던 언니와 요즘 부쩍 책에 빠진 나는
만나서 세 시간가량 책에 대한 토론, 그리고 거기서 파생되는 인생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나는 근황을 전했다.
"언니, 난 이번에 '복합성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질환을 진단받았어.
다음 달부터 국립정신건강센터에 트라우마 치료를 받으러 가.
올해 일은 쉬고 있지만, 이제야 내 몸과 마음을 온전히 치유할 수 있어.
조금 돌아가지만 그래도 건강해질 거니 가장 빠르게 가는 길을 찾은 것 같아."
그런데 언니는 의외의 대답을 했다.
"ㅇㅇ아, 사실 나도 그동안 너한테 이야기를 자세히 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의 폭력에 엄청 시달렸었어.
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나이에도 아빠가 집에 들어오면 경찰에 신고하곤 했어.
그런데 말이야. 우리는 어쩌면, 어린시절 가정환경이 중요하다는 프로이트의 심리학 사상이 워낙 일반화가 되어서 거기에 매몰되어 있는 걸 수도 있어.
사실 사람은 수많은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잖아.
어린시절 외에도 우리의 인생에 영향을 주는 선택들이 굉장히 많다는 뜻이야.
그러니 나는 너가 너무 거기에 얽매이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절대 너의 상처를 가볍게 보는 건 아니지만, 너는 그것보다 훨씬 더 잘 해낼 수 있잖아."
내가 겪어야 했던 매일매일의 학대는 무려 18년이라는 장기간동안 지속되었기 때문에,
나는 나의 가정폭력 문제를 절대 가볍게 보지 않는다. 그렇기에 치료해야 함이 분명하다.
하지만 언니의 말도 이해가 안되지는 않았다.
나 자신을 'C-PTSD' 환자라고 스스로 정의하여 한계를 설정하거나
이 질환이 나의 현재와 미래에 어떠한 악영향을 끼칠 거라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정말 그렇게 살 수밖에 없을 거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보다 덩치가 훨씬 더 큰 코끼리를 훈련시키는 방법으로
새끼코끼리의 발목에 쇠사슬을 채워놓고 도망가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이후 코끼리는 덩치가 커져 쇠사슬을 충분히 끊어낼 정도의 힘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밧줄만 묶어놔도 그 근방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학대와 방임과 같은 문제가
나의 뇌와 신경계 그리고 정서에 영향을 전혀 미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새끼코끼리 때만을 생각하며 밧줄을 쇠사슬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지, 자문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다. 그냥 이 깨달음을 얻었으면 되었고,
오늘 하루 충분히 괜찮게 살기로 선택함에 따라 충만한 하루를 보냈으면 됐다.
어떠한 과거를, 실패를 겪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부터 충분히 괜찮게 살아갈 수 있다. 괜찮게 살기로 결정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