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ung Apr 07. 2020

멋진신세계-19

자유의 대가, 자유를 희생한 대가

사진 출처: 가디언 (링크)


 "모임 금지 No Gatherings"라는 팻말 앞에 보란 듯이 사람들이 모여 햇살을 즐기고 있다. 호주의 한 해변가 풍경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세계 곳곳에서 시행되고 있지만 모든 시민이 다 협조적인 것은 아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모임을 갖고 여행을 간다. 한국에서는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이 연장된 날 상춘객으로 여의도가 가득 찼고(기사 링크), 중국에서도 강제 봉쇄가 끝나자마자 관광지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기사 링크).



 

4월 5일 여의도 풍경


4월 4일 중국 황산


 수많은 사례 중 압권은 바로 이 사람이다. 얼마 전 마이애미 비치에 봄방학을 즐기러 온 한 학생은 코로나19가 두렵지 않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https://twitter.com/CBSNews/status/1240371160078000128


 “코로나에 걸리면 걸리는 거죠. 제가 코로나 때문에 놀지 못할 일은 없을 거예요. If I get corona, I get corona. At the end of the day, I'm not gonna let it stop me from partying”


 그는 곧 자신의 철없는 발언에 대해 사과했으나 돌이키기엔 이미 너무 많은 사람의 공분을 사버렸다 (기사 링크).  




  나 역시 이 학생의 이기적이고 경솔한 인터뷰에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내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유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본성을 이 친구에게서 보았다면 아주 이상한 것일까?


  내 기억에 비교적 선명히 남아있는 몇 안 되는 고전소설 중 하나, 멋진 신세계가 떠오른다. 출생과 교육과 노동과 오락, 성생활과 사상과 감정까지 완벽하게 통제되는 문명사회에 야만인 존이 출현한다. 얼마간 문명사회를 경험한 존은 불편과 불행이 없는 이 멋지 신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자신이 살던 야만인 거주구역으로 돌아간다.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소설 말미에 나오는 대화 장면이다. 문명사회에서는 감정의 배설까지도 가장 안락한 방식으로 한다는 무스타파 몬드 총통의 설명에 존의 대답이 이렇게 이어진다.


 “하지만 난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  

 “사실상 당신은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는 셈이군요.” 무스타파 몬드가 말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야만인이 도전적으로 말했다. “나는 불행해질 권리를 주장하겠어요.”

 “늙고 추악해지고 성 불능이 되는 권리와 매독과 암에 시달리는 권리와 먹을 것이 너무 없어서 고생하는 권리와 이투성이가 되는 권리와 내일은 어떻게 될지 끊임없이 걱정하면서 살아갈 권리와 장티푸스를 앓을 권리와 온갖 종류의 형언할 수 없는 고통으로 괴로워할 권리는 물론이겠고요.”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런 것들을 모두 요구합니다.” 마침내 야만인이 말했다.


 전염병이 창궐해도 해변에서 파티를 즐기는 학생처럼, 인간에겐 위험해지고 불편해질 권리까지 추구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질병이 갖는 위험의 크기를 각자 기준대로 평가하고 그 위험을 감수할지 결정하는 것은 철저히 개인의 몫이다. 예상되는 위험의 크기가 외부활동의 효용보다 작다면 얼마든지 출근을 하고 나들이를 갈 수 있다.


 "If I get corona, I get corona"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특히 코로나19의 위험이 상대적으로 작은 젊은 사람들에게 국가가 앞장서서 집에 머물라고 강요하는 것은 명백한 자유의 침해이다. 자유의 대가는 개인이 지는 것이다. 국가가 위험으로부터의 보호를 명분 삼아 개인에게 주어진 행복추구권을 빼앗을 수는 없다.




 국가가 이번 코로나19 상황에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유일한 명분은 감염의 외부효과이다. 본인이 질병에 걸릴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전염시킬 수 있기 때문에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행하는 것이다. 이 역시 감염되고 싶지 않은 사람만 집에 머물면 해결되지만, 구조적으로 잠재적 감염자와의 접촉을 피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국가가 개입할 여지가 있다.


 하지만 (미필적 고의 포함)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을 해치기 위해 전염병을 전파하지 않는 이상 개인이 당국의 지침을 따를 의무는 없다. 자유주의 사회에서 공동체를 위한 희생은 미덕이지 의무가 아니다.


 사회 취약계층을 위해 건강한 사람들이 절제해야 한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약하다.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소득, 고자산가들은 어디까지 자신의 부를 포기해야 하는가. 청년들의 취업난을 해결하기 위해 장년들은 얼마나 빨리 은퇴를 해야 하는가. 사양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혁신기업 어느 정도의 규제를 가할 것인가.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개인의 권리를 포기하라 요구 위기가 아닐 때에도 이미 흔하게 있었고 사람들은 이에 저항해 왔다. 전염병이 유행하는 시기에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


 내가 코로나19 유행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자유의 중요성을 역설해 온 것은 내가 이 질병의 위험을 과소평가하거나 고위험군, 취약계층 사람들의 생명을 소홀히 여겨서가 아니다. 나는 오히려 더 철저히 위생에 신경 쓰고 엄격히 정부지침을 따르고 있다.


 다만 나는 전염병의 위험이 있는 상황에서도 자유의 제한은 당연한 것이 아니고, 국가의 개입이 최소한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이 국면이 지나가면 반드시 정부의 권한이 축소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자유의 제한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면 자유의 제한에 대한 대가도 요구할 수 있게 된다.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행했다면, 그로 인해 발생한 개인과 기업의 손실은 공동체가 보상해야 한다. 지급 규모와 방식에 여전히 혼선을 빚고 있는 긴급재난지원금은, 일반적인 복지나 구제가 아니라 자유의 희생에 대한 보상금이 되어야 한다. 미국 2500조 원, 독일 1000조 원, 영국과 프랑스 각각 500조 원으로 책정된 대규모 코로나 지원 재정 역시 국가가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자유를 희생한 대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코로나19 2차 유행이 우려되고 정부 방침을 어긴 개인에 대한 비난의 수위가 높아지는 이때, 나는 자유의 의미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본다. 국가 권력에 대한 순응보단 개인의 권리를 더 강조하며, 권리가 침해받을 때 마땅한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 내 역할이 아닐까 싶다.



덧. 저의 철없는 소수의견입니다. 의사선생님들과 코로나19 피해자 분들께 죄송해서 올릴까 말까 고민했지만 제 주변에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너무 없어서 용기를 내보았습니다. 비판도 환영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코로나19, 통계를 살피면 보이는 것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