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ung Nov 20. 2020

백신, 코로나 종식, 그리고 트럼프주의

다 같이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가을 재확산이 현실화되고 한국도 불안한 확진자 증가세가 지속되는 지금, 개발 중인 백신 후보들이 기대 이상의 효과를 보인다는 소식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다. 화이자와 모더나의 백신 후보 물질은 임상 최종단계에서 95%가량의 감염 감소 효과가 있었으며, 아스트라제네카의 백신 역시 임상 2상에서 70세 이상 고령 참가자까지 강한 면역 반응을 보였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이들 백신은 이르면 올해 말, 늦어도 내년 초에는 사용승인을 받고 생산에 들어갈 예정이어서 긴 팬데믹의 터널도 끝이 보이는 듯하다.


 이제 관심은 백신 확보 경쟁으로 넘어갔다. 미국, 일본, 영국, 대만 등이 화이자 백신 선구매를 완료한 사실이 알려지며 한국 정부의 뒤늦은 대처에 대한 비판 여론이 비등해졌다. 전통의 한일전 프레임을 가져온 매체도 있다. [일본 3.3억병 vs 한국 0]이란 헤드라인은 마치 스포츠 면의 기사를 보는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어찌 되었든 세계 각국에서 불확실성과 금전적 손해를 감안하고 선제적으로 백신 확보에 나선 반면 우리 정부는 늑장을 부리고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이어 우리 정부의 해명이 나왔다. 코백스 퍼실리티(COVAX Facility)라는 국제공조 프로그램을 통해 천만명 분의 백신은 이미 확보를 하였으며, 추가로 2천만 명 분의 백신을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기업과 협상 중에 있다는 것이다. 보관/유통의 용이성과 안정성이 검증되지 않은 백신을 서둘러 구입하기보단 지금처럼 상황을 관리하면서 추이를 지켜보겠다는 계획이다. 일견 일리 있어 보이지만 오래 고통받고 있는 국민들의 불안을 해소하기엔 당국이 너무 느긋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정부의 신속한 협상으로 백신이 확보된다 하더라도 조금 더 근본적인 질문은 남는다.


"과연 백신 접종이 팬데믹 상황을 얼마나 빨리 종식시킬 수 있을 것인가."


 가장 빠른 두 백신이 계획대로 승인받는다면 내년 1월까지 화이자는 최대 5천만 도즈, 모더나는 약 2천만 도즈를 생산할 예정이다. 1명이 2회 접종받아야 되기 때문에 실제 접종가능인원은 최대 3천5백만 명인데, 이중 해외 보급 분을 제외하면 미국 전체 국민의 5%가량만 올해 접종받게 된다(링크). 의료 및 방역 관련 종사자들과 고위험군을 우선 접종해도 올 겨울 안에 코로나 종식을 외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내년 말까지 생산 규모를 보면 화이자는 약 13억 도즈, 모더나는 최소 5억 도즈를 공급할 계획이며, 올 연말~내년 초에 임상 3상 결과 발표를 앞두고 있는 옥스포드-아스트라제네카, 노바백스, 존슨앤존슨 백신을 더하면 약 70억 도즈의 백신이 공급될 예정이다(중국, 러시아에서 개발 중인 백신까지 포함하면 약 130억 도즈). 존슨앤존슨 백신을 제외하면 다른 백신은 2회 접종이기 때문에 전부 성공한다는 전제 하에 전 세계 인구의 절반 가량이 맞을 수 있는 수준이다. 중국, 러시아 백신까지 보급되면 집단면역 수준의 인구가 백신을 맞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면 상황이 종식될까? 백신에 치명적인 부작용이 발견되지 않는 이상 지금보다 상황이 완화될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완전한 종식을 외치기까지 시간이 더 필요하다. 백신을 맞아도 감염 확률이 제로가 되지는 않는다. 백신이 있는 독감의 경우에도 연간 직간접 사망자가 1,500명에 달한다는 사실에 미뤄보아 현재 비교적 상황을 잘 관리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발생률/사망률은 비슷한 수준으로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변이가 일어나 백신의 효능이 떨어질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안심하기엔 아직 이르다는 뜻이다(물론 내 예상이 틀려서 완전한 종식이 빨리 온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그리고 문제는 우리만 종식된다고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코로나19는 전세계 218개 국가에 퍼져있다. 검사 역량이 괜찮은 선진국에서도 실제 감염의 20퍼센트도 못 찾아냈다는 연구결과도 있듯(링크), 저개발국에 얼마나 만연해 있을지 추정이 불가능하다. 우리나라에서 아무리 상황을 잘 관리한다 해도, 우리와 교류하는 다른 나라에서 감염 확산이 끝나지 않으면 섣불리 종식을 말할 수 없다. 현재 우리나라의 확진자 중 약 15%는 해외유입이며, 해외에서 감염 확산이 지속된 최근 해외유입 환자도 같이 늘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높아지는 우리 고용 구조상 장기간 국경을 봉쇄하기는 어렵다. 현재 약 250만 명 정도 되는 체류외국인 중 15세 이상 취업자는 약 90만 명에 달한다. 제조업종 중소기업과 농축산업의 외국인 노동력 수요는 해가 갈수록 많아진다(링크). 이번 코로나19 사태로 외국인 노동자 수급이 불가능해지자 수많은 기업이 운영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링크1, 링크2). 중소기업중앙회 조사에 따르면 코로나19로 인해 수개월 내에 생산에 차질을 빚을 것이라 답한 기업이 전체의 96.5퍼센트에 달했고 이중 64.1퍼센트는 이미 생산에 차질을 빚고 있었다(링크).


 국가 간 교류가 전혀 없이 사는 상태가 불가능하다면, 모두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연간 항공과 선박으로 한국에 입국하는 약 1,500만 명의 외국인들이 모두 백신을 접종할 수 있어야 종식이 가능하다.  

  



 그래서 백신 확보 경쟁 과열이 우려스럽다. 지불능력이 충분한 고소득 국가에서 필요 이상의 백신을 비축하기 시작하면 저개발국가에 돌아가는 몫이 적어진다. 감염병 백신 및 치료제의 공급 불균형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말라리아, 에이즈, 결핵 등 백신과 치료제로 관리 가능한 질병으로 연간 백만 명 이상이 사망하며 사망자는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에 집중되어 있다(링크). 코로나19 역시 백신이 균형 있게 배분되지 않으면 지구 어느 한 구석에서 계속 감염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전염성이 특별히 높은 이 병원체는 세계 각지의 그늘진 곳을 찾아 망가뜨릴 것이다. 코로나19의 진정한 종식을 위해선 백신의 균형적인 배분이 필수적이다.


코백스 설명 영상 중. https://www.gavi.org/vaccineswork/covax-explained

 

 이를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 중 하나가 앞서 언급한 코백스 퍼실리티이다. 코백스는 세계백신면역연합(GAVI)과 전염병유행대비혁신연합(CEPI)가 WHO의 지원을 받아 운영하는 일종의 백신 '공동구매' 프로그램이다(링크). 참여국 중 사정이 괜찮은 국가에선 백신 구매 비용을 선입금하여 백신 개발을 지원하고, 따로 모금을 받아 사정이 어려운 국가에 백신을 공급한다. 현재까지 93개 국가가 선입금 참여를 확정했고, 우즈벡, 필리핀, 북한 등 92개 중저소득 국가가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참여국은 코백스를 통해 보통 인구의 20%까지 백신을 공급받을 수 있으며 이는 각국의 고위험군을 위해 우선 배정될 예정이다.  


 승인이 완료되는 대로 코백스에 생산 물량을 공급하기로 계약한 백신 제조사는 총 9개이다. 다양한 후보 물질과 동시에 계약을 맺음으로써 고소득 국가는 개별 선구매에 비해 위험을 분산할 수 있다. 실제로 9개 중 8개 후보가 임상 실험 단계에 돌입했고, 모더나, 아스트라제네카, 노바백스는 3상을 완료했거나 진행 중이다(화이자는 아직 참여 논의 중). 저소득국가는 백신 구입 비용을 보조받을 수 있으므로 당연히 이득인 동시에, 이들로부터 넘어오는 잠재 감염원을 차단한다는 의미에서 고소득 국가가 얻는 간접이익도 분명히 존재한다.


 모두에게 유리한 이 국제공조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는 나라 중 단연 눈에 띄는 곳이 미국이다. 자체 생산량만으로 충분히 국내 수요를 감당할 수 있다는 계산에 의한 것이다(링크). 하지만 미국이 국제협력을 거부하고 독자노선을 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트럼프 집권 후 파리기후협약, 유네스코, 유엔 인권이사회 등에서 탈퇴했고 각종 무역 협상과 안보 협상에서 다자주의를 폐기하고 자국 우선주의를 고수했다(링크). 급기야 미국은 코로나 팬데믹의 한가운데인 지난 7월 WHO 탈퇴를 선언했으니 WHO가 주도하는 코백스에 기꺼이 참여할 이유가 없었다.


 국제 공조는 인류의 장기적인 생존을 위해 필수이지만 미국은 근시안적인 자국 우선주의를 택해왔다. 바이든 당선으로 미국은 일정 수준 다자주의로 선회하겠지만, 백신 공급이라는 자국민 생명과 직결된 문제에서도 (일시적으로) 자국 몫을 포기하는 결정을 쉽게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트럼프가 떠나가도 트럼프를 떠받치던 '실패한 국제주의'에 대한 반감은 일정 정도 지속될지 모른다.


 국제공조에 대한 거부가 비단 미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선진국들의 과도한 백신 선구매를 '선견지명이 돋보이는 신의 한 수' 정도로 포장하여 동경하는 시선이 보인다. 국제사회와 발맞추어 코백스에 가입하고 신중하게 필요한 양만큼만 구매하려는 우리 당국의 노력은 무능한 행위로 매도된다. 실제 우리 방역당국은 지난 8월 선진국들의 과도한 백신 확보 경쟁을 '사재기'라는 단어로 비판하며 국제공조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링크). 그러나 자국의 단기적인 이익 앞에 연대니 인류애니 협력이니 하는 단어들은 힘을 잃는다.

  

 트럼프의 낙선에 열광했던 사람들에게서조차 백신 확보에 대한 당국의 대처를 높이 평가하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지난 10개월간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며 자유나, 인권이나, 연대나, 국제협력 같이 인류가 그간 힘껏 쌓아왔던 수많은 가치들이 한 번에 무너지는 걸 봐왔다. 이번 백신 확보 경쟁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앞에서 역설했듯, 백신을 균형있게 나누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을 위한 행동이기도 하다. 다 같이 끝나기 전까지 끝난 게 아니다. 이 재난을 동시에 끝내기 위해선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한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연대니 협력이니 한가한 소리인 줄 알지만, 그래도 나 같은 사람 한 명쯤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오늘도 인기 없을 이야기를 적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스웨덴 집단면역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자, 이런 식으로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