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사례와 비교하여
제가 백신 전문가는 아니지만 직업상 해외 사례를 꽤 많이 들여다본 입장에서 우리 정부의 백신 확보 계획을 평가해보려 합니다. 부족한 부분은 댓글로 채워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실에 기초한 반론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우리가 확보한 백신 종류, 물량, 도입 및 접종 시기는 시사인 기사(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3631)를 참고해주세요. 이만큼 잘 정리한 기사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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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한 내용이 그대로 이행된다는 전제 하에 우리 정부의 백신 확보, 도입 및 접종시기는 늦지 않았습니다. 세가지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백신 '확보'보다 실제 백신 '접종(vaccination)'이 중요하다는 게 이 세가지를 관통하는 개념입니다.
1) 우리나라는 빠르게 접종을 시작할 만큼 긴급한 상황이 아닙니다.
환자가 넘치는 코로나19 병동, 영업제한으로 피해가 막심한 자영업자, 거리두기로 고통받는 동료 시민들을 생각할 때 '긴급한 상황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기 굉장히 죄송스럽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긴급'은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우선 우리에게 현재 상황에 대처할 여력이 있는지 봐야 합니다. 한발 앞선 준비가 미흡했던 게 너무도 안타까웠지만 지난 몇 주간의 노력으로 여유 병상이 꽤 마련되었습니다. 아직 시민들의 협조 여력이 남아있어 사회적 거리두기가 효과를 보였고 확진자 수도 조금씩 줄고 있습니다. 천명 내외의 확진자 수가 급격한 증가 없이 유지되면서 퇴원(격리 해제)하는 사람도 입원하는 사람 수준과 비슷해졌습니다. 긴장을 유지한 채 세부적으로 방역 자원 배분을 보강해가면 의료체계 붕괴는 막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다음은 다른 국가와의 비교입니다. 백신 접종을 서둘러 시작한 나라의 상황은 굳이 더 이야기할 필요가 없이 심각합니다. 미국, 영국을 비롯 유럽, 중동, 중남미 국가들 모두 거듭된 봉쇄에도 불구하고 유행 통제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의료체계 붕괴와 급증하는 사망으로 인해 서둘러 백신을 도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우리나라보다 사정이 나은 국가 중 백신 접종을 서두른 국가는 싱가포르가 유일합니다. 싱가포르의 1인당 누적 확진자 수는 우리나라보다 8배가량 많지만 사망자는 단 29명(1인당 아님, 전체 사망자 29명)에 불과하고 일일 확진자 수도 30명 내외로 안정적입니다. 싱가포르는 12월 30일부터 접종을 개시했고 지난 금요일(1.8)엔 리셴룽 총리가 백신 접종을 받았습니다*. 그 외 코로나19 피해가 비교적 적은 대만, 베트남, 뉴질랜드, 호주 등은 올 3월 이후에나 접종을 시작할 것으로 보입니다.
(* 단, 싱가포르는 인구 중 외국인 비중이 약 40%로 매우 높은 편이라 국경 통제의 비용이 굉장히 큽니다. 2020년 3분기 경제성장률 -7.0%(전년대비)로 경제 피해가 심각해 백신 접종이 시급했습니다.)
2) 성급한 접종 시작은 접종률을 낮출 가능성이 큽니다.
상황과 관계없이 빨리 맞기 시작해서 빨리 끝내면 좋은 것 아니냐, 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빨리 시작한다고 빨리 끝낼 수 있다는 보장은 전혀 없습니다.
백신을 접종하기 위해선 준비가 필요합니다. 백신을 운송, 보관할 수 있는 인프라가 갖춰져야 하고 접종을 시행할 전문인력이 필요합니다. 화이자, 모더나 같은 경우 각각 영하 70도, 20도의 냉동유통이 필요하기 때문에 유통과 접종이 더 까다롭습니다. 이에 대한 충분한 준비 없이 성급히 접종을 시작할 경우 오히려 백신 접종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접종률 역시 높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유통 문제로 백신 보급이 지연되고, 보관 온도가 잘 안 맞아 백신을 폐기하고, 백신 대신 치료제를 놓는 등의 시행착오가 현재 미국과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백신 공급에 대한 준비뿐 아니라 백신 수요에 대한 준비도 필수입니다. 아무리 인프라를 잘 갖추고 숙련된 인력이 접종을 한다 해도 사람들이 안 맞겠다고 나서면 무용지물입니다. 국가마다 접종 희망 비율이 상이한데 우리나라는 비교적 높은 편입니다. 입소스 조사에 따르면 12월 우리나라에서 백신을 맞겠다고 답한 사람의 비율은 75%입니다(링크). 10월만 해도 83%로 1,2위를 다퉜는데 두 달 새에 (아마도 좌우 가리지 않은 무의식적 안티백서들의 활약으로) 8%p 가량 떨어졌습니다. 맞지 않겠다는 사람의 80%는 부작용에 대한 걱정을 그 이유로 들었습니다.
조금 더 중요한 조사 결과는 따로 있습니다. 10월 조사에서 접종 시작 즉시 백신을 맞겠다고 한 사람의 비율은 12% 밖에 되지 않습니다(링크). 3개월 정도 지난 후 맞겠다는 사람은 59%, 1년 이내에 맞겠다는 사람은 86%입니다. 굳이 백신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도 초기 몇 달간 지켜보겠다는 마음은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전혀 새로운 기술로 10개월 만에 만든 백신입니다. 아무리 코로나가 무서워도 남들보다 앞서 맞는 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고백하자면 저만 해도 접종 시작하고 바로 맞을지 확신이 안 섭니다. 마스크 쓰고 사회적 거리두기에 큰 불편함이 없는 사람일수록 접종 의향은 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의 접종 추이를 관찰하는 기간이 일종의 완충지대 역할을 할 것으로 보입니다. 효과는 있는지, 부작용은 예상한 범위 내인지, 접종 과정의 시행착오는 무엇인지 살펴보고 대비하는 기회를 가짐으로써 오히려 접종 완료까지 걸리는 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 포함 비교적 사정이 괜찮은 나라에서 접종을 서두르지 않는 또 다른 이유입니다.
3) 백신의 효과가 유지되는 기간을 고려하여 단기간에 접종을 마쳐야 합니다.
백신의 목적은 1차로 중증화 방지와 사망률 감소이고 2차로 지역사회 감염 제거입니다. 1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초기 물량은 고령층, 기저질환자, 의료진에 돌아갑니다. 코로나19 사망은 고령층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약 천만명 가량 (65세 이상 인구 840만 명 + 고위험시설/의료/방역 인력 110만 명) 접종을 마치면 사망률은 거의 제로에 수렴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더하여 지역사회 감염 제거를 위해서는 집단면역 수준(6-70%)까지 접종 인구를 늘려야 합니다. 여기서 문제는 백신의 효과가 얼마나 지속될지 불분명하기 때문에 최대한 빠르게 광범위한 접종을 마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백신으로 형성된 면역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감소하는 것으로 관찰되었습니다. 수개월만에 보호 효과가 사라질지, 어제 모더나 CEO 말처럼 2년 이상 지속될지는 아직 모릅니다. 만약 집단면역 달성 이전에 접종자의 면역이 사라진다면 감염의 재확산도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시작만 빨리하고 무한정 접종기간을 늘리는 것보다, 시작을 좀 늦게 하더라도 단기간에 끝낼 수 있게 접종 계획을 세우는 것이 더 합리적이어 보입니다.
코로나19 사망자 수를 일정 수준 이하로 통제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1차 목적 달성을 위해 접종 시기를 당길 필요가 비교적 적습니다. 백신의 생산 및 공급 물량과 유효기간, 바이러스의 계절적 특성을 생각했을 때 내년 2분기 말~3분기 사이에 접종을 마치고 겨울을 맞이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안으로 생각합니다. 마침 정은경 청장도 어제 국회에서 11월까지 집단면역을 형성하는 계획을 발표하였습니다.
1), 2), 3)을 종합했을 때 저는 우리나라의 백신 확보 시기가 늦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확보도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물량만큼 하고, 도입과 접종도 최대한 빠르게 효율적으로 할 수 있으면 가장 좋았겠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통제할 수 없는 제약' 하에서 의사결정을 하게 합니다. 해외 사례와 비교해봤을 때 우리 정부의 결정은 합리적인 수준이었다고 판단됩니다.
백신 확보는 올림픽이 아닙니다. 옆 나라와 비교하지 않고 우리 상황에 맞게 준비, 도입, 접종 스케줄을 정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도입이 늦었다, 빨랐다는 따지는 것보다 지금 해야할 일은 무엇인지 파악하고 정부에 요구하는 태도가 더 시급히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덧. 단, 독감처럼 계절성 질환으로 매년 돌아오거나 백신이 들지 않는 변종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새로운 계획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덧2. 가디언에 마침 관련된 글이 나왔습니다. 호주, 뉴질랜드, 일본 등이 접종을 늦추는 이유에 관한 글입니다. 관심있으신 분들의 일독을 권합니다. https://www.theguardian.com/world/2021/jan/08/why-the-delay-the-nations-waiting-to-see-how-covid-vaccinations-unfo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