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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Jul 08. 2019

사실로 진실을 왜곡하기

한 전직 기자의 고백을 보며...

1.


 이진주 전 중앙일보 기자의 고백을 읽으며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의 고백 자체보다 그가 10년 전 썼던 한 유학생에 대한 기사가 더 눈에 들어왔다.


 월세 3500달러 집에 살며 "고급사양인 경우" 1억원이 넘는 외제차를 끌고 다니던 한 공무원의 아들. 아버지가 비자금게이트에 연루된 시기에 아들의 호화 유학생활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10년 전에는 가볍게 넘어갔는데 얼마전 유학생활을 마친터라 그런지 그 오래된 기사가 굉장히 개인적으로 다가왔다.


 내가 영국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집은 런던 외곽에 있는 3베드룸 하우스다. 작은 정원이 딸린 예쁜 2층집이었다. 그 집 렌트비가 당시 환율로 한 300만원 정도 했다.


 그리고 내가 몰던 차는 벤츠 c클래스였다. 출고되었을 때 정확한 가격은 모르지만 고급사양인 경우 당시 환율로 1억원이 훨씬 넘었을 것이다.


 이 두가지 사실만 알려진다면 나도 호화 유학생활을 했다고 비칠수 있을 것 같다. 가난한 사람과 함께 하는게 행복하니 어쩌니 하더니 순 위선자네, 비난해도 할말 없을 것이다. 거기에 내가 밉보인 적지 않은 사람들의 증언까지 한두마디 보태진다면, 아휴, 상상하기도 싫다. 우리 아버지도, 나도, 내 아들도 아마 공직에 나가게 되면 욕 좀 먹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내 유학생활은 전혀 호화롭지 않았다. 렌트 300만원의 우리 집은 영국에서 중산층 이하가 사는 Terraced house (여러채가 벽을 마주하여 늘어선 집)였다. 거기다 그 집에 우리만 산 것도 아니다. 학부 같이 나온 선배 한분과 후배 한명이 마침 같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어 아내까지 네명이 1년간 같이 살았고, 그 이후에도 여러 사람과 셰어하며 겨우 집세를 충당하였다. 거지같은 세입자랑 살면서 스트레스 받은 얘기는 밤새 풀어도 모자랄 지경이다.


 차도 마찬가지이다. 방황하는 한인 애들 데리고 다니며 돌봐주려고 차를 구해야 했는데 고학하는 유학생에게 당연히 돈이 모자랐다. 그래도 의미있는 일에 돈을 쓰자며 아껴둔 유학자금을 당겨서 중고차라도 사려고 알아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내 학교 선배 한분이 마침 남는 차가 있다며, 오래되서 팔기는 그렇고 필요하면 가져다 쓰라고 준 차가 저 벤츠이다. 98년 식이니 차 받을 당시 16년 정도 됐었고 그로부터 4년은 더 타서 20년 채우고 영국 나올 때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었다.


 파편적 사실은 진실을 가린다. 하지만 때론 진실보다 입맛에 맞는 사실이 주목받을 때가 있다. 혹시라도 나나 아내나 도준이가 공직에 나가게 돼서 누가 우리 유학생활 때 집세와 차를 놓고 트집을 잡을지도 모르겠다. 그 때 우리와 같이 지냈던, 아니면 잠깐이라도 와서 우리가 어떻게 지내는지 봤던 친구들이 우리를 변호해준다면 얼마나 기쁠까.


 10년 전 기사의 유학생이 나와 같은 상황인지 아닌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사실만 가지고 진실을 얼마든지 왜곡할 수 있다는 것, 기자들이 자기 프레임을 완성하기 위해 종종 이런 테크닉을 쓴다는 것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한 것 같다.




 2.


 내가 저 유학생의 아버지를 썩 좋아한건 아니다. 그분이 대통령에 당선될 때 나는 선거권조차 없었고, 대학와서 진보적인 친구들과 몰려다닐 땐 그분의 유연함이 불편했다.


 투표는 안 했지만 당시 대선 때 누가 대통령이 될지 친구들과 내기를 했었다. 나는 다수당 유력후보에 걸었다. 뭣모르던 시기에도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따위의 글을 읽고 다니던 터라 이념적으로 그 당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러가지 상황을 봤을 때 기호 1번이 대통령이 될 것 같았다. 대전 한달 전만 해도 상대후보의 지지율은 한나라당 후보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그 때가 2002년 월드컵 직후라, 대한축구협회장과 후보단일화를 했을 때 약간 불안하긴 했다. 하지만 단일화는 대선 전날 파투났고 나는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나 결국 간발의 차로 기호 2번이 당선 되었다. 나는 그때 당시 우리가 갈수 있는 최고의 레스토랑 베니건스에서 친구에게 비싼 밥을 사야 했다. 그래도 기분이 아주 나쁘진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돈을 가능성에 걸었지만 내 친구는 희망에 걸었었다. 희망이 가능성을 이기는 상황에 쓰는 돈은 별로 아깝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분은 임기 내내 언론이 씌운 프레임과 싸워왔던 것 같다. 이념에 얽매이지 않는 그 특유의 유연함은 늘 양 극단이 공격할 만한 꼬투리를 제공했다.


 "데스크가 기죽어 있는게" 싫어서 자극적인 기사를 써댄 기자들 때문에 그 희망이 무너졌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드러난 지금, 그때의 추억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3.


 소설가 이윤기 씨의 말을 빌리자면, "앞날이 구만리 같은 사람이 대뜸 안면을 회고조로 바꾸고 뒤를 돌아보는 짓은 아무래도 우습다." 그런데 이번 글에선 내가 조금 뒤를 돌아보았다. 근데 뒤를 본 것이 맞나? 여전히 현실은 10년전과 다를게 없다.


 최저임금을, 노동운동을, 이주민/난민을, 세월호 유가족을 다룬 기사에서 사실은 있지만 진실은 없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자기가 짠 프레임에 맞는 사실만 건져 주장을 지어가는 행태는 한 전직기자의 양심고백으로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 같다.


 절절한 사연과 자기연민으로 스스로를 변호했지만 그가 쉽게 용서받을 수 없는 이유는 언론이 지금도 여전히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커버사진 출처 및 관련기사 링크는 http://seoul.co.kr/news/newsView.php?id=20190708500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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