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ung Feb 20. 2021

최소한의 상처로 팬데믹을 살아남는 법

지난 1년간 코로나 관련 수많은 글을 남겼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제일 자랑스럽게 여기는 글은 [용인 66번 확진자 님께]다. 모두 힘겨운 거리두기에 동참하며 유행을 거의 잡아가던 시기, 클럽을 전전하다 감염되어 소위 '이태원 클럽발 유행'의 시발점이 된 그분께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얘기했던 대담한 글이다. 호응도 많았지만 격렬한 거부반응을 보인 사람도 많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난 확진자를 비난하는 게 극도로 조심스럽다. 부주의했거나, 방역수칙을 어겼거나, 활동반경이 넓었거나 하는 이유로 누군가를 비난하면 언젠가 반드시 나에게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장기전은 지난해 3~4월부터 예견됐고, 수개월간 아무도 안 만나고 집에 머물면서 방역에 협조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도 못 지키게 될 게 뻔한 법을 다른 사람이 안 지킨다고 욕하는 건 양심상 할 수 없었다.


 수칙을 어긴 사람들을 보고 '왜 시키는 대로 안 하냐'고 비난하는 분들이 여전히 많다. 난 그분들이 1년 내내 일탈 없이 협조할 만큼 예외적인 의지력을 가졌을 수도 있다고 본다. 다만 나는 그만큼 의지가 강한 사람이 아니고, 내 주변의 평범한 좋은 사람들도 방역 지침을 다 따르지 못하는 걸 관찰하며, 그 지침 자체가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할 뿐이다.  


 질병을 고의(미필적 고의 포함)로 전파하거나 방역체계를 교란한 게 아닌 이상, 확진자들의 특정 행위를 화제에 올리고 낙인찍는 건 팬데믹을 살아남는 최악의 방법이다. 단체로 식당에 가든, 클럽에 가든, 예배를 드리든, 스키장에 가든, 그건 감염 또는 감염 전파의 위험을 그 행위보다 더 낮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택한 일상이다. 내가 그들보다 위험을 더 높게 평가한다고 해서, 혹은 그들의 일상이 내게 낯선 것이라 해서 "이 시국에... 쯧쯧" 하며 함부로 판단할 일이 아니다.


 다른 이의 행동을, 취향을, 생각을, 일상을 내 기준으로 재단하고 비하하는 것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겉으로라도 서로 존중하며 인정하는 것이 문명사회의 조건 아니었나? 하지만 팬데믹은 인류가 힘겹게 쌓아온 이 원칙을 단숨에 무너뜨려버렸다. 타인의 일상 속에 포함된 행위들이 하필이면 방역의 관점에서 위험이 높은 행동이라 해도, 수개월 이상 그들의 권리를 빼앗을 자격이 누구에게 있을까. 1년이 넘도록 모두에게 동일한 기준을 따르라고 말하는 게 지독한 폭력임을 왜 아무도 지적하지 않을까. 규칙이 잘못됐다고 말하기보다 규칙을 어긴 사람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여전히 더 많이 들린다.


 '확진자 멍석말이'가 'K-방역'의 중요한 성공요인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도 불확실하다. 감염자에 대한 과도한 비난이 검사를 꺼리게 하여 오히려 숨은 전파를 늘렸을 수도 있다. 동선 공개하고 낙인찍혀 비난받느니 적당히 앓고 넘어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없었을까? 건강한 사람에게 별로 치명적이지 않은 코로나19 특성상 모르고 넘어간 사람의 비율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자진해서 검사받고 역학조사에 협조한 사람들은, 설령 감염의 과정에 부주의가 있었더라도, 비난이 아닌 칭찬을 받는 게 마땅하다.


 동조압력을 통해 서로 조심하는 사회 분위기가 감염 통제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는 게 아니다. '확진자 수 감소'라는 목표에 매몰되어 공동체가 파괴되는 걸 간과하지 말자는 것이다. 같은 룰이어도 지키기 쉬운 사람이 있고 지키기 어려운 사람이 있다는 걸 이해하고 법과 규칙을 현실화하자는 것이다. 위험에 따른 행동의 범위는 각자 자율에 맡기되, 확진 또는 증상 발현 후 대규모 감염으로 이어질 수 있는 행위만 법으로 통제하는 게 내가 생각하는 가장 상처가 적은 방법이다. 각자 위험을 평가하고 행동을 결정하는 데 앞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공동체의 몫이다.


 말은 쉽지만 몇가지 과제를 선결하지 않으면 '확진자 낙인'을 없애기 어려울 것이다. 거리두기 단계를 확진자 수에 연동할 때, 의료체계 미비로 확진자 증가를 소화하지 못할 때, 질병 자체에 대한 과도한 공포가 있을 때, 확진자 신상에 대한 언론의 관음증에 가까운 관심이 유지될 때, 아마도 상호 원망과 비난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결국 가치판단의 문제다. 우리 사회가 연대와, 상호존중과, 자유와, 인권을 '확진자 수 감소'라는 목표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가? 가치가 사라지고 공동체가 파괴되면 팬데믹을 살아남아도 다 무슨 소용일까. 이제는 '집에 머무는 것이 연대'라는 잘못된 상식을 극복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연구원 라이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