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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Sep 02. 2019

교육 불평등에 대한 나의 고백

이 글은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의 오랜 고민과 개인적인 고백을 담은 글입니다. 제가 종종 쓰는, 부끄러움을 털어내기 위한 그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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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한국 불평등, 불공정의 문제로 몸살을 고 있다. 분노에 찬 글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하지만 나는 화가 나지 않는다. 지난 국정농단 때와 같은 좌절과 분노, 실망 등의 감정이 일지 않는다. 왜 일까, 고민이다.

 

 우선 제기된 의혹들철저히 규명문제이지 아직 확정할 단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위법, 탈법 행위의 명백한 증거는 내 판단에 아직 없다. 예를 들어 후보자가 가족 관련 각종 특혜를 얻기 위해 청탁을 했다는 자백이나, 주위 사람의 증언, 통화내역, 현금흐름 등 직접 증거는 전혀 제시된 것이 없는 것으로 안다 (국정농단 때와 다른 이유). 그저 사람이면 당연히 그랬을 거라는 느슨한 개연성만 가지고 화기엔 내가 좀 더 신중한 편인 듯하다.


 하지만 명백히 드러난 사실만 가지고도 분노할 근거는 있다. 특히 기득권층의 지위를 통해 받은 딸의 교육, 입시 관련 특혜는 위법, 편법 여부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큰 문제이다. 이는 한국 사회의 불균형이 얼마나 심각한지 여실히 보여준다. 조국 후보자가 그간 보여온 진보적인 발언, 활동과 비교했을 때 표리부동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대학생들, 학부모들의 좌절과 분노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은 별로 화가 나지 않는다. 애초에 내가 문재인 정부를 진보 보지 않 점도 한 몫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나에게 이런 불균형이 그리 새로운 일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고백하건대 나는 오히려 그 기득권층의 일부였다.


 부모님은 나와 누나의 교육을 위해 강남에 아파트를 얻으셨다. 내가 중학교 졸업할 때 즈음 아버지가 대기업 임원이 되시면서 집에 금전적인 어려움은 없어졌던 것 같다. 부모님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방학 때마다 대치동서 학원도 다니고 과외도 종종 받았다. 덕분에 대학도 어렵지 않게 들어갔다. 대학시절 등록금이나 생활비 걱정도 해본 적 없고 영국 유학까지 다녀왔으니 꽤나 큰 특혜를 누렸다 할 수 있겠다 (결혼 전 첫번째 유학은 부모님 지원으로 다녀옴).


 그렇다고 내가 받은 혜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진 않았다. 나만 편하게 산다는 일종의 부채감 같은 걸 느끼며 내 방식으로 갚아 보려 나름 노력했다. 대학 시절 서울 열악한 공단지역 관련 책을 읽고 무료 과외를 해주겠답시고 전단지를 붙이고 다니기도 했다. 실제로 형편이 어려운 학생 여럿을 돈 안 받고 가르친 적도 있다.  첫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어릴 적부터 다니던 강남의 대형교회에서 퇴계원의 작은 교회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몇몇 아이들을 지도하며 서울-지방 간 격차를 새삼 느낄 기회도 있었다.

 

 결혼 후 완전히 독립해서 학비와 생활비를 스스로 마련한 것, 편안한 환경을 포기하고 남아공에 온 것도 내가 그간 받은 혜택을 조금이나마 갚으려는 내 작은 몸부림이었다. 그런데 내가 이런 것들을 온전히 내 힘으로 이뤄냈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성실함과 책임감, 삶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a.k.a 문화자본)가 없었다면 유학 생활을 잘 마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금전적 보상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사실, 내가 그럴만한 환경에 놓여있기 때문이라고 이전 글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링크). 내 삶은 내가 받은 특혜와 분리해서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이 특혜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며 살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기득권의 수혜자기 때문에 의사표현을 제한받아야 한다는 논리는 아무래도 용납하기 어렵다. 나는 학자의 의무 중 하나가 사회 참여라고 믿는다. 그런데 나는 내 삶의 궤적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주장은 전혀 할 수 없는 것일까? 예컨대 내가 강남에 살았기 때문에 부동산 개혁을 말할 수 없고, 사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교육 개혁을 말할 수 없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아닌가? 이런 얘기는 시장에서 물건을 산 적이 있는 사람은 자본주의를 비판할 자격이 없다는 말처럼 설득력이 없다. "내로남불"이 잘못 적용되는 지점이 너무 많아 보인다.


 오히려 불평등은 언제나 존재하다고 인정하고, 그 불평등의 사다리 위로 올라간 사람이 더 큰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게 더 현실적인 해결책 같다. 입시제도를 어떻게 바꿔도 재력과 정보력이 있는 사람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다. 사교육을 완전히 없앤다고 해도 어릴 때부터 길러 온 학습태도, 독서, 언어능력, 자존감 등은 결코 같아질 수 없다. 또 인위적인 교육평준화는 자율과 경쟁의 장점을 사라지게 한다.


 그래서 이 불균형한 구조 위에 혜택을 누린  사람들이 그로 인해 얻은 결과물을 어떻게 나눌지 고민하는 게 더 필요하다. 능력 없으면 니네 부모를 원망하라는 태도는 곤란하다. 복지 확대, 사회안전망 확충, 최저임금 인상, 양질의 공공서비스 제공, 공정거래 확립 등등 계층 간 (결과의) 격차를 줄이는 여러 개혁정책을 사용할 수 있다. 계층 간 격차가 줄어들면 계층 이동에 들이는 막대한 자원낭비도 줄일 수 있고 개개인이 자기가 선택한 삶 안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게 된다. 불균형이 있다는 걸 인정한 상태에서 그 결과를 사회가 고르게 나누는 것이 소위 리버럴들의 정책기조이고 나도 많은 부분 생각을 같이 한다.



 정리하자면, 이번에 드러난 교육 불평등의 문제 나에겐 별로 새로울 게 없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불균형 속에서, 이 불균형 때문에, 개혁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기득권을 가졌다는 사실 자체로 개혁의 자격을 잃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에겐 기득권으로 얻은 결과를 얼마나 책임감 있게 나누려 하는지가 더 중요한 기준이다. 그렇지 않고는 나 역시 학계든 사회에 뭔가를 기여할 수 있는 여지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내 배경과 상관없이 계속 더 발전한 사회를 꿈꿀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 글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나에 대한 이야기다.



* 주. 그러나 진짜 심각한 불균형은 따로 있다. 조 후보자 딸은 더 유리한 위치에서 시작했을지언정 어쨌든 다른 사람과 함께 경쟁했다. 애초에 "평민"들과 경쟁할 필요가 없는 부류들이 있다. 건물이나 땅, 사업체, 그리고 교회까지 통째로 물려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고생해서 대학에 가거나 고시를 볼 필요가 없다. 요새 교사 친구들이 심심치 않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학습태도가 안 좋은 애들은 두 부류로 나뉜단다. 형편이 안 좋아서 부모가 신경을 못 써주는 경우, 아니면 굳이 공부할 필요가 없는 경우. 부모가 찾아와서 우리 앤 공부할 필요 없어요 스트레스 주지 마세요라고 항의한 적도 있다고... 이게 더 심각한, 그리고 경제에도 득이 안 되는, 불균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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