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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Jun 22. 2019

이상의 무게

다른 이의 삶을 함부로 예단하지 않기

(남아공 관찰기를 읽고 오시면 이해가 더 쉽습니다.)



  나와 아내는 키 차이가 한 30cm쯤 난다. 둘이 같이 다니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내 키가 190 정도 되는 줄 아는데, 사실은 180 조금 넘는다.


  그래서 그런지 아내는 본인 키뿐 아니라 애기 키에도 민감하다. 만약 나중에 도준이 키가 작으면 분명 엄마 탓을 할거라며 밥을 무지막지하게 먹인다. 내가 보기엔 많이 먹은거 같은데 엄마는 선거철 정치인처럼 온갖 공약들을 늘어놓으며 (ex. 밥 먹으면 딸기 줄게) 도준이 배가 빵빵해질 때까지 한입이라도 더 먹인다.


  그럴 때면 내가 꼭 한마디 한다.


 "여보, 도준이 키 안 커도 괜찮아. 내가 여보 키 커서 좋아했어? 우리 세상의 기준에 도준이를 끼워 맞추지 말자. 키가 작든 크든 넌 그 자체로 소중하다고 말해주자."


  난 내가 이 말을 할 때마다 스스로 감동받는데 아내는 귓등으로도 안 듣고 쏘아붙인다.


  "말은 쉽지. 넌 키가 작아본 적이 없어서 몰라."


  아마도 나와 아내는, '키와 상관없이 넌 소중해'라는 이상의 무게를 다르게 재는 것 같다. 내가 키 때문에 불이익을 당한 적이 없어서 너무 쉽게 아내의, 그리고 키 문제로 자존감에 상처 입은 사람들의 고민을 가벼이 여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남아공에 오기로 결정할 때 걱정거리 중 하나가 돈 문제였다. 영국에 남아 있었으면 지금 월급의 두배 이상은 벌 수 있었다. 물가를 감안해도 여기 수입은 터무니없이 낮다 (나중에 쓸 기회가 있겠지만 남아공 생활비가 영국보다 싼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곳에 오기로 결정한 것은,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나의 가치관 때문이었다. 덜 풍요롭고 덜 안정적이어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과 함께 하는 것이 더 큰 행복을 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이 곳에 왔고, 실제로 난 여기서 매일 감사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내가 비교적 쉽게 이런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내가 그럴 수 있는 환경에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에 있을 때 부모님께 손 안 벌리겠다고 아내와 함께 투잡 쓰리잡 뛰며 공부를 겨우 마치긴 했지만, 적어도 매달 갚아야 할 빚이 있지는 않았다. 양가 부모님도 우리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어렵진 않으시다. 오히려 도준이 용돈도 가끔 보내주시고 한국에 가면 우리 지낼 방 한 칸 정도 내주실 여유는 되신다. 뒷배 봐줄 사람이 있는 나에게 ‘돈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을 추구하자’는 이상은 그리 무겁지 않았던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 근사한 말이 훨씬 더 무겁게 다가갈 것이다. 이번 달 수입이 없으면 당장 대출 이자를 갚을 수 없는 사람에게 ‘지금 당장 일을 그만두고 자아를 찾아 떠나세요’ 따위의 말이 얼마나 허황되게 들릴까.




  생각해보면 내가 정언명령으로 받아들이던 많은 명제들이 누군가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구호로 다가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신분을 숨기고 사선을 넘어온 탈북자에게,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부당해고로 생활의 기반을 잃고 남은 선택지가 과격한 시위밖에 없는 절박한 노동자들이 “그래도 폭력은 나쁜 거야”라는 말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끔찍한 사건, 사고, 범죄의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사람들에게 “이제 과거는 잊고 미래를 지향하자”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평생을 편견과 차별에 고통받아온 소수자들에게 “솔직하고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라”라는 말은 도리어 지독한 폭력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만의 이상의 무게를 견디며 살아간다. 거기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그저 다양한 삶의 형태가 있을 뿐이다. 나는 이곳에서 내게 주어진 분량을 감당하며 살아가겠지만, 그걸로 우쭐할 이유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그런 삶을 요구할 생각도 없다. 그 누구의 삶도 내 기준으로 예단하지 않고 따뜻하게 응원해주는 넉넉한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그래서 그 누구도 나의 이상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되기를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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