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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Jun 24. 2019

언로의 독점과 기독교


 이전에 아내와 나의 키 차이에 대해서 글을 페북에 올렸었다(링크). 아내가 그 글의 최종본을 본 것은 다음날 아침이었다. 아내는 왜 이리 과장을 했냐며 사람들이 자기를 나쁘게 볼 것 같다고 걱정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글을 적었지만 사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의 문맥에 맞게 대화의 전후를 재배치하고 약간의 과장을 넣기도 한다. 나나 아내가 실제와 다르게 비치는 모습이 있을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보통 나는 더 좋게 아내는 조금 안 좋게…).


  불평하는 아내에게 내가 농담조로 대꾸했다.


   “그러면 여보도 글을 써. 여보가 생각하는 나에 대해서 쓰면 되잖아. 원래 스피커가 큰 사람이 유리한 거야.”


  아내 역시 받아친다.


  “그럼 내가 지금 댓글 단다. MSG 치지 말라고.”


  둘 다 웃고 말았지만 내가 한 말은 웃어 넘기기엔 무거운 말이다. 언로를 잡은 사람은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에 훨씬 유리한 위치에 서있다. 아내가 기회 될 때마다 사람들에게 내 위선을 폭로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공개된 공간에 글을 쓸 의도도, 그럴 여유도 없을 것임을 안다. 적어도 우리 가정 안에선 내가 언로를 쥐고 있는 것이다.




  페북 친구 몆명 더 있는 나도 그런데 팔로워 수가 수천수만에 이르는 페북 셀럽들은 얼마나 더 자신을 대단하게 여길까. 어떤 이슈가 터지면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설득력을 얻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페북이란 공간에선 "좋아요"만 있지 "싫어요"가 없기 때문에 본인이 하는 말이 적절한지 판단해볼 수 있는 외부의 견제장치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싫으면 그냥 안 보고 넘어가지 굳이 찾아가서 싫은 소리 하는 사람은 (있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견제받지 않은 헛소리가 해악을 끼치는 공간은 소셜미디어로 한정되지 않는다. 보수적인 기독교인으로서 목사님들을 비판하는 것이 불편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오래전부터 교회가 그런 공간이 되어왔다. 일반적인 교회의 의사결정 구조 상 목사는 가장 큰 스피커를 지닌 존재이다. 뒤에서 이런저런 얘기들이 오가다가도 예배시간에 목사가 성경구절에 의지해 본인의 의견을 피력하면 대부분의 성도는 듣게 되어 있다. 설교시간에 손을 들고 목사에게 반론을 제기하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오래전이긴 한데 사랑의교회에 다니던 한 대학원 선배와의 일화가 생각난다. 그때가 막 서초동에 새로운 예배당을 짓는다고 건축헌금을 모으던 때였던 것 같은데, 새로 온 오 목사가 너무 무리한 일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선배의 불평을 들은 기억이 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형이 오더니, 전임 옥한흠 목사님이 오셔서 건축은 꼭 해야 된다고 설교하셨다고, 마음에 안 들지만 존경하는 원로목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한번 믿어보겠다고 얘기했다. 결과적으론 그 일로 해당 교회뿐 아니라 개신교 전체가 분열하고 기독교의 신뢰도는 땅에 떨어졌지만, 그 당시에 선배는 일개 성도로서 목사님의 말을 믿을 뿐 다른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전 모 목사가 최근에 뉴스에 많이 나온다. 나는 이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성경, 혹은 기독교의 정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확신하지만, 이런 사람이 자기 얘기를 여과 없이 하게 내버려 둔 것은 피할 수 없는 한국 기독교계의 과오이다. 강단에서 견제받지 않고 도리어 성도들의 호응을 받으며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목사들은 자기 생각이 틀렸다고 의심하지 않는다. 거기다 노회며 총회며 상급 단체들 역시 동일한 목사들로 채워져 있어서 위로 갈수록 문제가 심해지면 심해지지 해결되기 어렵다. 언로의 차단은 위에 있는 사람이나 아래 있는 사람이나 모두를 비이성적 광기로 몰아간다.


  이런 세태에 비판의식을 가지고 나름의 노력을 하시는 많은 목사님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언로의 독점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스피커가 큰 사람이 자기검열과 자기비판을 통해 책임 있는 언설을 하는 것은 일시적으로만 가능하다. 사람은 그런 존재이다. 견제하고 균형을 맞춰주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여지없이 무너진다.


  그래서 이 문제는 시스템으로 해결해야 한다. 모든 구성원이 스피커를 가지게 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스피커가 큰 사람일수록 더 철저한 검열과 비판을 거치게 하고, 검증을 통과 못 하면 언제든지 스피커를 빼앗을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한다.


  교회가 목사에게 설교권을 전임하기보다 구성원들이 돌아가면서 설교를 하거나 목사의 설교를 정기적으로 비평하는 모임을 갖는 것이 가능한 대안이 될 것이다. 내가 가끔 교회에서 이런 주장을 하면 목사님들이 거부반응을 보이시곤 했는데, 사실 종교개혁의 핵심은 성직자에게서 성경해석의 독점권을 빼앗아 성도들에게 나누어 준 것 아닌가. 개혁된 교회라고 자부하는 개신교 교회가 중세시대 같은 제왕적, 비민주적 권력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 괴물을 키워내는 것은 시스템이다.




  답답한 마음에 어투가 조금 공격적이 된 것 같다. 하지만 한국교회에서 자라 온 사람으로서, 청년 시절 뜨겁게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분의 목적에 합당한 삶을 살기로 결정한 사람으로서, 그래서 나름의 기준에 따라 남들이 안 가는 길을 걷고 있는 사람으로서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에 이 글을 남긴다. 교회의 자정을 위해 노력하고 계시는 여러 목회자, 신학자 분들께도 응원의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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