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 올 때 제일 걱정이 치안 문제였다. 근데 한 8개월쯤 살아보니 치안보단 각종 행정처리가 더 큰 스트레스다.
일처리가 느린 건 그러려니 한다. 영국도 그랬고 어차피 한국만큼 행정이 빠른 곳은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근데 돼야 할 일은 안되고 안돼도 괜찮은 일은 되는, 어떨 땐 말도 못 할 엄격한 규정을 들이대다가 또 어떨 땐 과한 융통성을 발휘하는, 그 불확실성은 정말 견디기가 어렵다. 예측을 할 수가 없다.
다 말하려면 밤을 새도 모자라다만, 은행 관련 에피소드만 몇 개 적어본다.
처음에 계좌를 만드는 과정부터 험난했다. 그나마 친구가 본인이 거래하던 은행 직원을 소개해 줘서 첫 약속은 어렵지 않게 잡았다. 학교에서 신원보증도 다 해줬기 때문에 계좌 개설에 큰 어려움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직원에게 서류에 문제가 없으며 2-3일 후에 연락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1주일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다. 전화해도 연결이 잘 안 된다. 한참 기다려 리셉션 같은데 연결이 돼서 그 직원 좀 바꿔달라고 하면 알았다고 대답은 한다. 그러고 한참 신호대기를 하다가 그냥 끊긴다. 다시 걸면 또 안 받는다. 이걸 몇번 반복하면 한두 시간은 훌쩍 간다.
결국 안 되겠다 싶어서 직접 찾아갔다. 서류를 받아갔던 직원은 자리에 없다. 리셉션에 물어보니 오늘 바빠서 못 만날 거라고 한다. 한국이면 알았다고 하고 돌아왔겠지만 들은 얘기가 있어서 여러 번 강하게 요청했다. 지금 계좌가 없어서 월급을 못 받고 있다고, 연락 주겠다고 하고 한참 지났고 전화 연결도 안된다고 따졌다. 그 사람 아니어도 좋으니 계좌 좀 열어달라고 졸라댔다.
직원은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겠다고 하고 어디로 간다. 그렇게 또 한참 기다리니 처음에 만났던 직원이랑 같이 돌아온다. 미안하다고, 너무 바빴다고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한다. 영업시간이 지나서까지 기다려서 한참만에 겨우 계좌를 열었다. 따져서 될거면 왜 처음부터 안해줬는지 모르겠다. 먼저 해주길 마냥 기다렸으면 지금까지도 계좌 없이 지내야 했을지도 모른다.
이 정도로 끝났으면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계좌를 열 때 신청했던 카드를 수령하는데 또 한참이 걸렸다. 은행 영업시간엔 내가 직장에 있기 때문에 아내가 대신 가서 받기로 했다. 처음엔 내 신분증만 가지고 오면 받을 수 있다고 해서 아내가 본인 여권과 내 여권 두 개를 챙겨 지점으로 갔다.
그런데 은행에서 카드를 못 준다고 한다. 가족인지 증명이 안된다나. 그러면서 무슨 위임장 같은 양식을 주며 내가 거기에 사인을 해야 대리수령이 가능하다고 했단다. 퇴근하고 와서 아내가 받아온 양식을 꼼꼼히 작성하고 사인까지 했다. 뭐든 과하게 준비해야 한다고 해서 적은 내용을 증명해줄 자료도 몇개 첨부해서 아내에게 넘겨줬다.
그리고 다음날, 아내가 서류를 준비해서 다시 은행에 갔더니 이번엔 다른 직원이 와서 또 못 준다고 한다. 잘못된 양식을 작성했다고, 다른 양식을 작성해야 된다고 한다. 너네 직원이 준 양식이라고 하니까 그건 그 사람 잘못이고 자기는 카드를 내줄 수가 없단다. 지금은 담담하게 말하지만 그때 아내가 느낀 분노는 수화기 너머로도 고스란히 전달됐다. 결국 주말에 내가 직접 가서 받았다. 며칠 빨리 받으려다 고생만 했다.
한두개만 쓰려고 했는데 쓰다 보니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너무 많다. 그래서 두개 더.
그렇게 은행 계좌를 열고 카드까지 받아서 잘 쓰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카드결제가 안 되기 시작했다. 알아보니 카드가 막혔다고 한다. 은행에 가서 풀어달라고 하니 지점에서는 못하고 콜센터로 전화를 해야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은행에 있는 전화기로 어디에 전화를 건다. 직원이라고 바로 연결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거는 것처럼 똑같이 한참을 기다린다. 신호 대기음으로 나오는 은행 주제곡 같은 게 아직도 머리에 맴돈다. 이럴 거면 내가 전화하지 왜 지점까지 왔나 싶다.
그렇게 연결이 된 부서는 사기 전담 부서. 카드가 막혔는데 왜 사기 부서로 전화를 하는지 모르겠다. 한참 통화하더니 내가 한국에서 받은 돈이 너무 커서 확인을 하는 과정에 카드가 막혔단다. 내가 보이스피싱 당해서 돈을 보낸 것도 아니고 받은 돈인데 도대체 왜 내 카드를 막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무슨 문제로 카드가 막혔으면 나한테 알려줘서 확인을 하던지 해야지 아무 말도 안해주고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린다.
그거 내가 보낸 문제없는 돈이라고 하니까 알았다고 자기가 처리하겠다고, 24시간 지나면 카드를 다시 사용할 수 있다고 해서 그렇게 알고 나왔다. 은행에서 전화 걸고 확인하고 하는데 두시간쯤 걸린 거 같다.
근데 24시간이 지나도 카드가 안된다. 그럼 그렇지, 한 번에 되는 게 이상하지 하고 다시 지점에 찾아갔다. 미안하다고, 분명히 처리했는데 왜 안되는지 모르겠다고 다시 해주겠다고 한다. 또 사기 부서에 전화를 건다. 뭔가 처리가 제대로 안됐었는데 다시 했다고, 24시간 후에 확인하라고 한다.
이번엔 그냥 안나오고 엄청 따졌다. 저번에도 그랬는데 안됐다, 내가 돈을 못 쓰고 있다 하니까 한참 듣다가 다른 카드를 하나 더 발급해주겠다고 한다. 몇 가지 기능이 안될 뿐 결제하는덴 문제가 없을 거라고, 카드 하나를 그 자리에서 바로 내준다. 처음 카드는 신청하고 수령하는데 일주일이 넘게 걸렸는데 이번엔 왠지 너무 쉬워서 억울하다.
임시로 받은 카드를 쓰며 다시 24시간이 지났다. 막힌 카드는 역시 될 생각을 안한다. 도대체 이 문제로 시간을 얼마나 허비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또 찾아갔다. 가니까 미안하다고, 왜 안되는지 모르겠다고 그냥 새로 발급해준 카드만 쓰면 안 되겠냐고 한다.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온다. 이대로 물러날 순 없지, 어쩌고 저쩌고 엄청 불평을 늘어놨다. 그러니까 그러면 아예 카드를 새로 발급해주겠다고 해서 결국 며칠 뒤 새 카드를 받았다. 남아공 와서 컴플레인하는 영어만 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사실 이거 때문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학회를 몇군데 다녀야 해서 지출이 좀 있었다. 내가 먼저 비행기랑 숙소 등 대금을 결제하면 나중에 학교에서 그만큼 나에게 지급해주는 방식이다. 근데 딜레이가 좀 심하다. 지난 8월 말에 다녀온 학회 돈을 아직도 못 받았고, 다음 주에 또 갈 일이 있어 비행기 값을 미리 결제했는데 그것도 한참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여기저기 알아봐서 언제까진 돈을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보통 돈이 떨어지면 한국에서 돈을 보내는데 약속한 대로 돈을 받으면 꼭 수수료 내며 송금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잠시 기다렸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남아공 통장에 잔고가 거의 안 남았다. 또 올라오는 짜증을 겨우 참고 학교 근처 은행에 갔다. 한국 카드를 사용해서 돈을 좀 뽑을 요량이었다. 은행 앞 ATM기에서 출금하려 카드를 넣은 순간, 기계가 갑자기 고장나며 카드를 먹었다. 기계는 곧 정상으로 돌아왔는데 카드는 다시 안 나온다.
금요일 오후라 은행은 닫고 직원도 다 퇴근해서 ATM에 나와았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기도 사기 부서...). 한참을 기다려 연결된 직원은 또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한다. ATM이 카드를 먹으면 다시 안 돌려주는 게 자기네 정책이라고 한다. 카드에 문제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책임도 아니라고 한다. 기계가 고장 났다고 말해도 소용이 없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단다. 그냥 기계 열고 카드 꺼내 주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어렵나 보다. 거의 30분을 붙잡고 얘기해도 같은 말 반복이다. 내가 전화했다는 기록만 넘겨달라고 하고 끊었다. 강도가 아니라 은행이 카드를 빼앗아 갔다.
일단 이메일로 불만을 접수하고 월요일 아침 일찍 다시 은행에 찾아갔다. 은행 직원도 똑같은 말을 한다. 카드에 문제가 있어서 기계가 카드를 가져 갔고, 한번 들어온 카드는 다시 돌려줄 수가 없다고 한다. 심지어 자기가 아침에 ATM 기에서 내 카드를 회수하긴 했는데 은행 정책상 돌려주지 않기 때문에 그냥 잘라버렸다고 한다. 진짜 화 참느라 노력 많이 했다. 아니 그냥 돌려주면 되지 멀쩡한 카드를 왜 잘라버리는지 이해가 안 된다. 신분확인이 어렵다 어쩌고 해서 카드에 내 이름도 있고, 여차하면 한국에 전화 걸어 확인하는 방법도 있다고 얘기해도 말이 안 통한다. 더 이상은 시간 낭비다 싶어 그냥 나왔다.
결국 며칠 동안 초긴축모드로 지나다가 이번주에 돈을 받아서 위기는 넘겼다만, 정신적인 피해는 복구가 안된다. 이런 비상식적인 일들이 셀 수 없이 많이 일어났다. 정말 "되는 일이 없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다른 힘든 일들은 어느정도 예상을 하고 와서 견딜만 한데 행정미숙으로 낭비되는 시간과 에너지는 감당이 좀 어렵다.
이런 일들을 몇번 겪다 보면 꼭 한국 생각이 난다. 어딜 가나 빠르고 정확한 한국 행정시스템이 그리워진다 (푸념으로 시작해서 애국으로 끝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