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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Nov 27. 2019

Beyond numbers

경향신문 산업재해 특집 관련 몇가지 생각들


사진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11210600155&code=940702#csidx3d1b9adbd8bd970953e112a35b494e4

1.

 떨어짐, 끼임, 뒤집힘, 깔림, 물체에 맞음...


 지난 21일 경향신문 1면은 근무 중 중대재해로 사망한 노동자 1200명의 이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매일 김용균이 있었다]라는 특집기사 시리즈의 표지면이다.


 사망자 통계를 다루는 건 나 같은 연구자에게 일상과도 같다. 마침 지난 1주일 간 일과시간의 대부분을 20세기 초 남아공 웨스턴케이프 지역의 사망자 명단을 정리하는 데 쓰고 있었다. 만 명 조금 넘는 사람들의 사인, 나이, 인종, 직업 등을 분석해서 당시 사망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뭐였는지 살펴볼 계획이었다.


 수천수만 건의 사례를 다루다 보면 사망자 한 명에 집중하기가 어렵다. 내 컴퓨터에 입력되는 자료 한 줄이 실제로 죽은 한 사람이라는 걸 떠올리기 쉽지 않다. 이 사람의 미래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는 것, 누군가 이 죽음을 애통해했다는 것, 그의 몫을 감당해내야 할 가족들이 있었다는 것 들을 생각해내지 못한다. 설령 내가 이 통계를 분석해 사망의 구조적 요인을 밝혀 내고 인류의 지식을 한 뼘이라도 늘린다 해도, 백 년 전 죽어간 이 일만여 명의 사람들은 나에게 숫자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그래서 사망자 한사람 한사람에 주목한 이 특집기사가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숫자 하나에 이름 하나가 있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내가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 숫자 뒤에 숨어있는 망자들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한다면 내 연구가 제대로 방향을 잡을 수 있을까.


 어제 실린 김훈 작가의 특별기고(링크)는 나를 더 부끄럽게 했다.


 "늘 그렇지만 빛나는 말이 모자라서 세상이 이 지경인 것은 아니다. 말은 늘 넘치고 넘친다... 말들은 양쪽으로 묶여서 서로 마주보며 짖어대는데 그 사이의 현실의 땅바닥으로 사람들의 몸이 떨어져서 으깨진다. 말은 들끓고 세상은 요지부동이다... 내 무력한 글로 지껄이고 따지느니보다 저 여인숙의 원혼들과 끌어안고 함께 통곡하는 편이 더 사람다울 것이다."


 나는 일류 논객이 아니지만서도, 말로만 떠들고 글로만 정의로웠지 지금껏 죽어간, 앞으로 죽어갈 "사람"들과 함께 통곡해 본 적이 있었나. 안타깝게도 그렇다고 답할 자신이 없다.




2.  

 사회과학의 연구방법론은 크게 정량quantitative 연구와 정성qualitative 연구로 나뉜다. 샘플 사이즈가 큰 수치 데이터를 분석해 특정 가설을 증명하는 게 정량 연구라면 개별 케이스 하나하나를 다각도에서 더 깊이 들여다보는 게 정성 연구라 할 수 있다. 각각의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에 한 가지 방법론만으로 어떤 현상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연구자의 시간과 역량에 제한이 있는 한 모든 방법론을 두루 섭렵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하나라도 제대로 해야 할 텐데 나같이 어정쩡한 사람은 늘 생각만 많고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나 한다. 개별 케이스의 특수성을 소홀히 여기는 정량연구의 한계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가 계속 고민이었다.


 순수 경제학에서 경제사로 옮겨 온 중요한 이유 중 하나도 "숫자 너머에 (beyond numbers)" 있는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파악하지 않고는 인간사회를 정확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석사, 박사 지원할 때 썼던 자기소개서마다 이 "beyond numbers"라는 문구가 빠지지 않고 들어가 있고, 심지어 직장에 지원할 때도 내 학문의 여정을 이 문구로 설명한 바 있다.


 하지만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시간 내에 박사를 마치기 위해선 양적 연구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 한번 썼듯 경제학 배경을 가진 내가 수치 너머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선 수치 분석보다 배 이상의 노력을 들여야 했다. 편한 대로, 익숙한 대로 하다 보니 박사 논문도 그렇고 지금까지도 연구 방향이 정량분석 쪽으로 흘러오게 됐다. 그러다 보니 beyond numbers는 나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장식품에 불과할 뿐 실제 연구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사망자의 이름이 빼곡히 들어 선 신문 1면이 특별하게 느껴졌던 것도 그 탓인 듯하다. 숙제처럼 남겨져 있던 말, "숫자 너머에" 바로 사람이 있다는 걸 다시금 새기게 해 주었다.


 



3.

 공식통계로만 봐도 우리나라 산업재해 사망률은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이며, 산재로 처리되지 않은 사망자의 수치를 포함하면 더 높을 것이라 본다. 소득은 계속 증가하는데 왜 노동자의 안전은 보장되지 않을까.


 정확한 건 자세히 분석해봐야 알겠지만 언뜻 관찰하기에 몇가지 이유들이 떠오른다. 주말이나 근무 외 시간에 사망사고가 다수 발생한 걸로 보아 휴식 없는 장시간 노동이 사고율을 높이는 한 요인이 됨이 분명하다. 또 5인 미만 사업체 사망률이 제일 높다는 것은 소규모 사업장에서 안전 관리가 미비하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비용 문제로 법으로 정해진 안전장비를 갖추지 않는 작업장이 많은 것도 높은 재해율의 이유로 지목된다. 법규를 위반하거나 실제 사망사고가 발생해도 사업주가 받는 처벌 수위가 높지 않기 때문에 안전 관련 조치가 철저히 이뤄지지 못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론 노동보다 이윤을 중시하는 사람들의 인식이 문제이다. 이 인식이 바뀌지 않고서는 아무리 규제를 강화하고 법을 정비해도 별 효과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 보다 강력한 처벌을 도입할 경우 사업주들이 책임을 피하기 위해 가장 위험한 작업을 최하위 하청업체 또는 이주노동자에게 떠넘기고, 산업재해 등록 자체를 기피하게 될 수도 있다


 궁극적인 해결책은 노동자를 소모품으로 생각하는 사회의 근본 철학이 바뀌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2차 산업혁명 시기라 불리는 19세기 유럽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비교적 규모가 큰 공장이 세워지고 분업을 통해 생산량은 급증하였지만 사회 전체의 건강 관련 지표는 오히려 쇠퇴하고 기대수명도 감소하였다. 안전 대책이 미비한 상태에서 새로운 기계들이 가동되고, 규제가 전혀 없는 상황에 여성 및 아동 노동자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장시간 일해야 했다. 공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각종 오염물질로 대기 및 수질이 악화되어 건강에 악영향을 주었다.


 이 건강지표들이 19세기 초 수준을 다시 넘어서기까지 백 년 이상이 걸렸다. 그 사이 노동법이 강화되고 각종 안전 관련 규제가 마련되었지만, 소득을 위해 노동자가 희생되어선 안된다는 인식의 변화까진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노동자를 중시하는 사회인식의 변화가 생산성까지 높아지게 했다는 것은 덤이다.


 그런 의미에서 경향신문의 이번 기획과, 관련 연구자/활동가 분들의 활동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꾸준히, 효과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의 노력이 더 많은 주목을 받을수록 안전한 사회를 더 빠르게 이뤄갈 수 있을 것이다.




4.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한국에 들어가면 이런 주제에 대해 더 자세히 연구해보고 싶다. 책상 앞에서 추상적인 문제만 고민하는 대신 실제 사람들의 삶을 볼 수 있는, 그리고 그 삶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하는 연구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난 태도에 비해 역량이 부족한 게 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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