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살 딸아이가 5시간 동안 자리를 뜨지 않은 이유

미술의 힘, 몰입의 즐거움, 과정에서 배우다.

by ISTJ

주말 내내 우리는 미완의 작품들을 앞에 두고 서로에게 따뜻한 박수를 보냈다. 실력을 뽐내는 자리가 아니라, 서로의 서툰 ‘과정’을 응원해 주는 자리. 그 어설픈 발표회 속에서 우리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연결된 공동체임을 느꼈다. 효율성이라는 잣대를 내려놓고 아이의 속도를 따라간 나의 마음도 조금 더 깊어졌다. 우리는 그렇게 미술이라는 과정을 통해, 서로를 거울삼아 함께 자라간다.

아이는 미술을 사랑한다. 하지만 예민한 기질을 가진 아이에게 미술은 늘 양날의 검이었다. 네 살 무렵, 아이는 타인이 있을 때 결코 붓을 들지 않았다. 자신의 작품이 누군가와 비교되고 평가받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 어린 마음속에 자리 잡은 ‘완벽주의’라는 창살이 아이의 손을 묶어버렸던 것 같다.


그랬던 아이가 이제 재료와 종이의 다양성을 탐구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풍요롭게 채울 줄 아는 존재로 자랐다. 그리고 우리는 한국예술인진흥원에서 주관하는 가족 예술 프로그램 ‘가가호호’에 참여하게 되었다. 가가호호(家家戶戶), 집집마다의 개성을 예술로 깨워 화목한 가정 활동을 돕겠다는 이 프로젝트의 취지는 근사했다.


하지만 막상 마주한 현실은 뜻밖이었다. 아이뿐만 아니라 부모 또한 온전히 ‘창작자’로서 미술에 몰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살림과 육아, 산더미 같은 빨래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효율성 없는 일을 왜 하고 있어야 하나"라는 어른의 조급함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첫날, 우리는 150가지가 넘는 감정 카드를 마주했다. 우리는 평소 ‘좋다’, ‘싫다’는 투박한 단어 속에 얼마나 많은 감정의 결을 구겨 넣고 살았던가. 아이가 조심스레 고른 카드는 ‘아쉽다’와 ‘어렵다’였다. 그 카드를 보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아이는 그동안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혹은 기대했던 것이 어긋날 때마다 그저 "싫어!"라고 뭉뚱그려 외치곤 했다. 하지만 그 "싫어"라는 외마디 비명 안에는 '이 상황이 나에게 너무 어려워요', '이 순간이 끝나가는 게 아쉬워요'라는 세밀한 언어들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자기 분화(Self-differentiation)’라는 개념을 떠올렸다. 말이 어렵지만, 사실은 ‘나와 너 사이에 투명한 울타리를 세우는 일’이다. 아이가 울면 나도 눈물이 나고, 아이의 실패를 나의 실패로 느끼는 것은 분화되지 못한 상태다. 나는 아이에게 미술을 통해 가르쳐주고 싶었다. "엄마가 기쁘다고 해서 너도 기뻐할 필요는 없어. 네 마음속에 있는 '아쉬움'은 온전히 네 것이고, 엄마의 '피곤함'은 엄마의 것이야." 우리가 서로를 너무 사랑해서 하나가 되려고 할 때 오히려 상처가 생긴다. 각자의 감정을 존중하며 적절한 거리를 두는 것, 그것이 진짜 화목의 시작이다.


6세인 아이가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장장 5시간 동안 자리를 뜨지 않고 몰입하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심리학자 칙센트미하이가 말한 '플로우(Flow)', 즉 시간의 흐름조차 잊은 채 대상과 하나가 되는 몰입의 상태에 아이는 이미 들어가 있었다. 엉덩이가 무거운 아이가 아니었음에도, 색을 조합하며 '오로라 색'을 발견해낼 때 아이의 눈동자는 형언할 수 없는 생동감으로 빛났다. 어쩌면 아이에게 미술은 '결과물을 만드는 노동'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풍경을 밖으로 꺼내는 '자유로운 놀이' 그 자체였던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곳의 분위기였다. 참여한 아이들의 연령은 7세부터 12세까지 다양했지만, 그곳에 ‘나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12세 형과 7세 동생이, 그리고 그들의 부모들이 서로의 작품을 두고 평등한 대화를 나눴다. 마치 서구권 국가에서 이름만 부르며 토론하는 풍경처럼, 우리는 한국 특유의 수직적인 서열을 잊은 채 수평선 위에서 만났다. 어른들도 모처럼 아이처럼 크게 웃었다. "이게 맞나?"라는 의구심 대신 "이것도 재밌네!"라는 유연함이 공기를 채웠다.


5시간의 몰입을 견뎌낸 아이의 키가 한 뼘 더 커진 것처럼, 효율성이라는 잣대를 내려놓고 아이의 속도를 따라간 나의 마음도 조금 더 깊어졌다. 마지막 발표 시간, 아이는 여전히 타인의 시선이 두려워 뒷걸음질 쳤지만 나는 다그치지 않았다. 발표는 나를 증명하는 쇼가 아니라, 내 안의 울림을 타인에게 건네는 수평적인 만남이라는 것을 아이도 언젠가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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