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崔致遠)과 쌍여분(雙女墳)스토리
1편 당나라 유학길
2편 최치원(崔致遠)과 쌍여분(雙女墳)■
1992년 한중간의 국교가 수립되기 전에도 민간차원의 경제교류가 있었지만, 수교 이후 의 양국 관계는 가히 폭발적으로 발전했다.
그 정점의 시기가 2005년 전후로 상하이 (上海)에만 10여만 명, 그리고 화동(華東) 지역인 장쑤성(江蘇省)과 저장성(浙江省) 내에 3~4만 명의 한인들이 주재하고 있었다.
특히 장쑤성(江蘇省)의 쑤저우(蘇州), 우시 (無錫), 쩐장(鎭江), 양저우(揚州)와 난징 (南京) 등지가 한국 기업들과 교민들의 중심 무대였다.
중국인과 업무는 인간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경향이 많았다. 중국인들은 소위 a"꽌시 (關系)"를 중요시하는데 주로 물질적 관계로 이루어졌다.
반면, 문학적인 교류와 인격적 소통은 깊은 신뢰를 쌓을 수 있었다. 그 징검다리 소재 (素材)가 주로 두보(杜甫)와 이백(李白), 그리고 신라의 최치원(崔致遠)이었다. 최치원(崔致遠)이 중국의 식자층(識者層) 에게 그토록 널리 알려진 데 대해 놀랐다.
당나라 시대 양저우(揚州)는 장강(長江)과 운하(運河)가 연결된 국제 무역항으로 신라, 일본, 인도, 아랍, 페르시아 등의 상인들의 활동 무대였다.
특히 양저우(揚州)는 b신라방(新羅坊)이 있을 정도로 만여 명의 신라 상인들과 승려, 유학생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근래(近來)에 양저우(揚州)에 최치원(崔致遠) 기념관이 2007년 8월에 개관했다.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은 신라 47대 헌안왕(憲安王 857~861) 때 출생하여 869년 겨우 열두 살의 나이에 홀로 당나라의 장안(長安) 유학길에 올랐다.
약관(弱冠)도 되기 전인 874년 유학 6년 만에 등과(登科)하여 난징(南京)이 관할하는 율수현위(溧水縣尉) 직분으로 활동했다.
최치원(崔致遠)이 유학하고 남경(南京)에서 당나라 관료로 지내던 기간 중에 황소의 난(黃巢亂 AD 874-884)이 일어나 장안 (長安)이 함락되고 당나라의 권위가 붕괴 했다.
최치원(崔致遠)이 쓴 c토황소격문 (討黃巢檄文)이 당대의 유명세를 탔다. 문장의 기승전결(起承轉結)이 가지런하고 명문(名文)이라 황소(黃巢)가 그 격문 (檄文)을 읽고 놀라 침상에서 떨어졌다고 전한다. 격문(檄文)의 전문(全文)은 난중(亂中)에 소실되고 요지(要旨)만 인용(引用)되고 있다.
王室多難 生靈塗炭 왕실다난 생령도탄
義兵一起 凶徒自滅 의병일기 흉도자멸
不誅黃巢 何以謝天下불주황소 하이사천하
d誅
왕실은 난리로 시달리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도다
의로운 군사가 일어나면
흉악한 무리는 스스로 멸할 것이다
황소를 토벌하지 않고서야
천하에 어떻게 사죄하겠는가?
남경(南京) 율수현(溧水縣)을 흐르는 진회하(秦淮河)의 상류 강변에 두 자매의 무덤(雙女墳)이 있다. 이 무덤과 최치원 (崔致遠)이 얽힌 설화(說話) 같은 얘기가 그가 쓴 447자(字)의 시(詩) 한 편에 전해지고 있다.
진회하(秦淮河) 상류변의 쌍여분(雙女墳)
최치원(崔致遠)이 율수현위(溧水縣尉)로 있던 어느 날 화산(花山)이란 곳을 유람하다 진회하(秦淮河) 강변 잡초(雜草) 우거진 언덕에 두 자매의 무덤을 보았다.
그 사연을 알길 없는 무덤 앞에서 최치원 (崔致遠)이 그들을 향한 연민과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즉석에서 애도(哀悼)의 글을 써 무덤 석벽(石壁)에 붙여놓았다.
誰家二女此遺墳 (수가이녀 차유분)
寂寂泉扃畿怨春 (적적천경기원춘)
e泉扃
누구네 두 딸이 이곳에 묻혔는가
적막한 저승에서 얼마나 봄을 원망했으랴!
역관(驛館)으로 돌아온 그날 밤 아름다운 두 자매의 혼령(魂靈)이 찾아와 최치원 (崔致遠)과 시문(詩文)을 읊으며 춤을 추고 f진진지호(秦晋之好)를 즐긴 후 두 자매는 떠나가 버렸다.
다음날 아침 최치원(崔致遠)이 아쉬운 마음에 그 무덤에 다시 찾아가 서성이다 격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단숨에 447자 (字)의 쌍여분(雙女墳) 시를 지어 남겼다.
暗草塵昏雙女墳 古來名迹竟誰聞
잡초 우거져 어둑한 진토 속 두 여인의
무덤이여, 예로부터 내려오는 이 이야기를
누가 들었는고?
.. 로 시작하는 최치원(崔致遠)의 시는 마치 현실세계에서 이루어지는 남녀 간의 사랑을 섬세한 몽상적(夢想的) 언어로 묘사하고 있어 한시(漢詩)로서의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세월 따라.. <32> 마지막 편에 원문과 번역을 게재(揭載) 할 예정입니다.)
최치원(崔致遠)의 이미지 그림. 중국문헌
최치원(崔致遠)은 당나라 관료로 활동하다 신라 헌강왕(875~886) 때인 885년에 귀국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29세였고, 유학 떠난지 16년 만의 귀국이었다.
당시 신라의 골품제(骨品制)라는 신분질서 에 막혀 중앙의 핵심권력에는 진입하지 못 하고, 귀국 초기에는 h시독(侍讀) 겸 i한림학사(翰林學士)로 활동하다 이후 충청.전라도의 지방 태수 (太守)와 행정책임자로 선정을 베풀었다는 평가가 전해지고 있다.
최치원(崔致遠)은 진성여왕(887~897) 때 국가개혁안(國家改革案)인 g시무십여조 (時務十餘條)를 상소했으나 귀족들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이후 그는 사찰 등지에서 은둔 생활을 하며 많은 시문(詩文)을 남겼는데 대표적인 문집이 계원필경(桂苑筆耕)이다.
그의 사망에 대한 기록은 흐릿하다.
산중에서 은둔하다 죽었다, 혹은 신선(神仙) 이 되었다는 전설(傳說)도 있다. (끝)
註)
a꽌시(關系) 비공식적인 호혜적 관계망
b신라방(新羅坊) 신라인들의 사는 촌(村)
c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 계원필경에 수록
d주(誅) 잘못을 따져 벌하다(벨 주)
e천경(泉扃) 속세와 통하는 門이 닫힌 황천
f진진지호(秦晋之好) 운우지정(雲雨之情)
g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
- 부패한 귀족정치 비판
- 인재등용 공정성
- 지방통치 개선
- 국가 기강 회복 등을 강조한 국가개혁안
h시독(侍讀)임금에게 글을 읽어주는 관직
i한림학사(翰林學士)임금의 글을 쓰는 관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