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棗) 이야기
세상 온갖 맛있는 과일들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에 棗栗梨枾 (대추 밤 배 감)을 들고 나와 매대(賣臺) 위에 올리려니 조금은 쑥스럽기도 하고 시대착오적일 수도 있겠다 하는 이유 없는 불안을 느낀다. 미쉘린 셰프가 운영하는 스테이크 레스또랑 옆에 순대국밥집을 개업하려고 하는 불안한 기분이랄까 그렇다. 순대국밥을 폄하하는 의도는 절대 아니고 토종음식을 대비코져 하는 말이다.
棗栗梨枾 네 가지 우리 과일을 한꺼번에 매대에 올리는 것이 무뢰(無賴)하다 할 만큼 하나하나가 각기 엄중하고 깊은 스토리를 품고 있다. 이는 어디까지나 유전자를 변형시킨 우리 과일이 아닌 전래(傳來)의 토종 과일을 말한다. 요즘 대추를 비롯한 토종 과일들이 개량되어 맛이나 수확량에도 엄청난 발전을 가져온 것이 사실이다. 소비자들은 환호할 것이나 예전에 그 과일 하나하나에 숨은 이야기를 캐내는 입장에서 개량 과일의 맛과 형태는 옛것과 연상되지 않아 아쉬운 면이 있다.
어느 날 한 지체 높은 양반과 그의 몸종 돌쇠가 먼 길을 떠나게 되었는데 양반은 말을 타고 앞서가고 돌쇠는 봇짐을 지고 터들터들 걸으며 따라가기가 힘들고 지쳐갔다. 무엇보다 먼 길을 가다 보니 길양식도 다 떨어져 배고픔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래도 지체 높은 양반은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는 나도 양반의 체통이 있지 "배고프다"라는 말은 죽어도 하지 않았다. 그 양반이 허리춤을 이리저리 뒤적이다 손가락 한마디 보다 작은 바짝 말린 대추 한 알을 돌쇠에게 건네며,
"오늘 저녁이다." 하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한꺼번에 삼키지 말고 천천히 먹거라."
돌쇠는 기가 차고 매가 찼다. 무쇠라도 녹여 삼킬 돌쇤데 겨우 코딱지만 한 쪼글쪼글한 대추 한 알로 저녁을 때우라고 하니..
돌쇠가 어이없어 돌아서서 혼잣말로,
"대추 두 알 먹었다간 배 터져 죽겠네.."
라고 하더란다.
할머니가 얘기를 끝내고, "얘들아, 재미있지, 재미있지?" 하시며 웃음을 강요하신다. 손주들은 잠깐 뜸을 들이다 동시에 폭발적인 공감을 보낸다. 할머니 치마 허리춤에는 무엇이 숨어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옛이야기를 시작할 때면 주인공은 항상 허리춤에 숨어있었다. 그 달짝지근하던 말린 대추맛이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