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枾) 이야기
서리가 하얗게 내린 하늘 꼭대기 감나무 가지에는 겨울이 지나도록 빨갛게 익은 홍시 몇 알이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동네에서 제일 높은 감나무라고 했다. 우리는 하늘 밑에서 제일 높은 나무라고 으스댔다. 어릴 때 비행기를 타보지 않아 감나무 보다 더 높은 곳은 올라가 본 적이 없었다. 바람도 꼭대기 위로만 다녔지 밑줄기로는 좀처럼 내려오지 않았다. 여름 내내 서늘한 그늘에서 오수 (午睡)도 즐기고 널따란 가지에 올라 책도 읽었다. 동네 사람들이 다 좋아했다.
매미란 놈들이 감나무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뒷산 비탈에 그 수많은 고목은 놓아두고 우리 집 감나무에서만 붙어서 울어댔다. 매미가 노래한다라는 말이 없는 걸 보면 매미들은 분명 울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아무도 동정 (同情)하지 않고 낮잠만 잘 잤다. 감나무 자랑으로 빠졌다. 자랑해도 좋은 감나무였다.
중학교 시절에 엄니는 감을 팔아 삼 형제를 공부시켰다. 지금은 이름조차 없어진 감이다. 대봉(大峯) 감과 모양은 비슷했는데 분명 대봉은 아니었다. 우리는 그때 그 감을 "대고디"라고 불렀는데 그 이름조차 사라졌다. 그때 대봉감은 감 축에도 들지 못했다.
요즘은 단감이 대세다. 이웃집에 단감나무 한그루가 있었다. 감이 누르스름한 빛깔을 띠게 되면 단맛이 돌았고 동네 아이들이 몰래 담을 넘어와서 따먹다. 그 집 아이들은 일을 찾아 도회지(都會地)로 나가고 나이 많은 노인들만 살았다. 단감나무 옆에는 개살구 나무도 한 그루 있었는데 늦은 봄이면 노란 살구들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어른들이 일 나갈 때면 망아지만 한 개를 묶어놓았다. 무서운 개였다.
한국인의 내면적 정서(情敍)를 진하게 품고 있는 과일이 아마도 감이 아닐까? 과일의 대표성은 아닐지라도 너무 달지도, 너무 화려하지도 않은 과일이다. 늦가을 파란 시골 하늘 아래 잎은 다 떨어지고 빨간 감들만 조롱조롱 달린 풍경은 매혹적이다. 특히 이방인들 눈에는 더더욱 이국적으로 보일 게다.
오래된 감나무의 속은 단단하고 맑고 매끈하여 예전에는 화살촉과 종이로 사용되었단다. 잘 익은 홍시(紅枾)는 겉과 속이 다르지 않아 충절(忠節)의 과일로 불렸으며, 말랑말랑하여 이가 없는 부모님 들이 좋아하신 과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충효문무(忠孝文武)를 다 아우르고 있어 가벼운 과일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꼭대기에 달린 감은 따지 말라고 했다. 높은 가지에 올라가지 말라는 줄 알았는데 오가는
날짐승들 먹으라고 남겨두라는 뜻이었다니 박애(博愛)의 과일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