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율이시(棗栗梨枾) 3

배(梨) 이야기

by Morpheus

그때 산골의 증조부와 할아버지가 사셨던 집은 나지막한 초가집이었다. 사랑채는 증조부가 거처(居處) 하시는 방과 커다란 가마솥이 걸린 외양간이 딸려있었다. 외양간에는 송아지가 딸린 어미소가 되새김질을 하고 있었다. 본채와 사랑채는 대나무들이 울타리처럼 둥그랗게 감싸고 있어 아늑하고 푸근했다.


대나무 울타리 사이에 돌배나무 한 그루가 이방인처럼 껴있었다. 증조부께서 선영(先塋)이 있는 머루골에서 캐다 심었다고 하셨는데, 가을철이면 아이들 주먹보다 작은 노르스름한 돌배들이 조롱조롱 열였다. 할아버지가 그 돌배를 따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흘려듣고 올라가다 된통 혼이 났다. 그 돌배맛이 시금털털했음이 할아버지 경고의 의미였음도 알았다. 그 돌배는 조율이시(棗栗梨枾)의 배(梨)에 끼지 못했다.


어린 기억 속에 집안에 제사가 참 많았다. 특히 설이나 추석에 지내는 제삿날에는 두루마기 입은 집안 어른들이 많이 오셨고, 초저녁부터 제사상 준비가 분주했다. 할아버지가 배를 깎으실 때에는 손주들이 조르르 앉아 기회를 엿본다. 배 껍질의 달큼한 맛을 알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배 깎으시는 기술은 신기 (神技)에 가까웠다. 배 머리에서 꼭지까지 떨어지지 않게 한 번에 깎으시는데 껍질은 창호지보다 얇았다. 할머니가 옆에서 손주들을 생각해서 좀 도툼 도툼하게 깎으라고 핀잔을 하셔도 할아버지의 원칙은 준수되었다. 정말 운 좋은 날은 삼촌이 과도(果刀)를 잡는 날이었다. 잘못 깎았다는 핑계로 제사상에 올릴 배를 무참히 쪼개어 아이들에게 배급(配給)하고 할아버지의 "진노(震怒)의 십자가"를 혼자 지셨다.


배(梨) 이야기를 하다 보니 오비이락 (烏飛梨落)이란 말이 생각난다. 할아버지집 울타리의 돌배도 그랬지만 배는 꼭지가 튼튼해서 까마귀 한 두 마리가 날아간다고 떨어지지 않는다. 오비도락(烏飛桃落)이면 모르겠다. 이락(梨落)의 범인(犯人)은 절대 까마귀가 아닐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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