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율이시(棗栗梨枾) 4

밤(栗) 이야기

by Morpheus

선영(先塋)으로 가는 길은 길이 없었다. 산촌에 묻혀 살아가는 삼촌(三寸)이 해마다 두세 번씩 우거진 칡이나 머루 다래덩굴을 쳐내야 길이 보였다. 널따란 선영 바로 아래는 낮에도 으스스한 기운이 흐르는 밀림 같은 골짜기다. 백 년도 넘은 솔송나무 굴참나무 상수리나무들이 하늘을 덮고 있고 바람은 나무들 꼭대기 위로 고고하게 지나 다녔다.


산비탈에는 유별나게 밤나무가 많았다. 후손들을 위해 선조들이 심어놓았다는 얘기는 들었으나 언제적 선조인지는 모른다. 밤나무를 지키기 위해 아카시아 나무들을 심었다는데 그 숲도 만만찮다. 아카시아 숲 속에는 할아버지와 삼촌이 벌통을 몇 개를 놓아두었는데 4-5월경에 벌들이 분봉 (分蜂)할 때면 삼촌은 벌 받는다고 바빴다. 벌들이 순했다. 망토시도 하지 않고 벌을 받아도 벌들은 쏘지 않았다.


산비탈에 오뉴월이 오면 아카시아꽃 향기와 밤꽃 향기가 진동을 한다. 꽃향기는 마을까지 내려왔다. 산촌의 아이들은 아카시아꽃송이 를 따서 쪽쪽 빨고 다녔다. 달큼하다고. 정말 단것이 귀했다. 아카시아 꽃송이들은 이파리 아래로 쳐져있어 마치 나무가 자식을 키우듯 이 꽃을 품고 있다. 밤꽃 향기는 비릿하면서 도 독특했다.


추석이 가까워 오면 할아버지와 삼촌은 지푸라기 망태기와 장대를 짊어지고 밤골로 향한다. 우리는 벌어진 밤송이에서 떨어진 밤들 줍기에 바빴다. 밤골의 밤들은 정말 굵었다. 진짜 굵은 밤은 삼촌이 장대로 치면 송이채로 떨어진다. 밤송이에는 알밤 세 개가 들어있다. 가운데 놈이 제일 튼실하고 반들 거린다. 할아버지는 굵은 놈을 골라 뒷마당 어딘가에 묻어두신다. 다람쥐들이 도토리 감추듯이 할아버지의 밤 묻기는 은밀히 이뤄진다.


설날 밤에는 집안 어른들이 안방으로 건너와 제사상 준비를 한다. 감 대신에 곶감이 차려 지고 배를 깎고 밤을 친다. 껍질을 깐 밤은 *보늬를 쳐서 육각형 마름모 모양으로 만드 는 삼촌의 손놀림은 장인(匠人)급이다. 문명의 이기(利器)는 코딱지만큼도 없었던 산촌의 긴 겨울밤을 할머니는 아재 개그와 난센스 퀴즈로 때운다.


"감 중에 못 먹는 감이 뭐냐?"라든가, "밤 중에 제일 아픈 밤이 뭐냐?" 등등이다. 이미 재탕 삼탕을 거친 난센스 퀴즈다. 손주들은 처음 듣는다는 듯이 능청을 부린다. 아이들은 할머니의 허리춤에서 무엇이 나올지 예견 (豫見)이 가능하다. 할머니의 퀴즈 가짓수는 해마다 줄어들었다. 재고관리(在庫管理)가

잘 되지 않았다. 그것이 할머니에게 닥칠 중풍의 전초였음을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보늬 : 밤의 내율피(內栗皮) 떫은 부분

keyword
작가의 이전글조율이시(棗栗梨枾)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