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비에 젖은 香港(c)
개인도 마찬가지지만 조직이나 국가의 내실(內實)과 선 자리(立地)가 탄탄하면 외풍이나 위기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실(不實)을 경계하고 내실 (內實)을 다지는 일들을 개을리 하지 않는다. 모든 일에 기초를 탄탄히 다진 다음에 영역을 넓혀간다.
1990년대 초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국가들은 경제성장에 대한 열망이 대단했다. 특히 국제무대에서 네 마리의 용(四小龍)이라 불렸던 국가들은 경쟁적으로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했다. 동남아 국가들과는 달리 자원이 부족한 한국은 외국자본 의존도가 높았다. 무역이 경제성장을 주도했고, 외채는 벌어서 갚아간다는 자신감이 앞섰다.
1994~1996년도의 경제상황을 보면 무역규모는 늘어나는데 경상수지는 악화 되어가고 원화가치는 고평가 되었다. 일부 대기업들은 경상수지 적자를 외채로 메꿔 가고 있었다. 약한 충격에도 크게 흔들릴 구조가 되어가고 있었다.
일본의 버블경제 붕괴로 금융계의 위기가 아시아권에 공급된 단기자금 회수로 이어지며 국내 기업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외화 자금이 빠져나가며 원화의 환율이 급격히 올라갔다. 97년 초에 850~ 900원/$가 12월에는 1,900원/$까지 치솟았다.
태국을 비롯한 인도네시아 홍콩 대만도 금융위기의 파도가 출렁였다. 홍콩은 금융정보의 집산지(集散地)였고 또한 생산지였다.
금융위기의 파고가 높은 시기였는데 여행업계에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환율이 출렁이니 여행객의 움직임이 활발했다. 달러화의 강세 속에 한국을 여행하는 동남아 관광객이 폭증했다. 특히 홍콩의 여행객들이 명동거리를 가득 채웠다. 광둥어를 하는 가이드의 인기가 높았다. 이전의 하루 여행 경비로 이틀간의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나라 밖에서 바라보는 한국의 금융위기는 기업들의 단기외채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것이 주요 원인 중의 하나라고 분석하였다.
기업의 구조적 변화 없이 손쉬운 단기외채를 과도하게 차입하여 내실(內實)을 다지지 못한 채 외부의 충격에 흔들린 재난으로 평가되었다.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 라는 기구가 금융위기란 말로 대체되고 구조조정이란 용어는 실업(失業)과 명퇴 (名退)와 등치(等置)되었다.
뒤돌아보면 1997.12월부터 4여 년 동안 혹독했던 시기는 한국경제의 재도약 (再跳躍)을 위한 내실(內實) 다지기로 평가하고 있다.
그해, 1997년 6월 홍콩은 비바람이 잦았다. 우기(雨期)에 비가 내리는 것은 당연한 절기(節期)의 문제다. 그런데 그해 유월은 평소보다 두 배의 강우량이 홍콩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홍콩이 비에 젖었다.
"홍콩반환(香港返還)"
99년의 약속을 이행하는 유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완차이(灣仔)의 빅토리아 해변 에서 계획했던 반환식은 거친 비바람으로 HKCEC (Hong Kong Convention & Exhibition Centre)로 자리를 옮겼다.
반환식장은 군인들과 깃발들의 무대였다. 여왕의 메시지를 전하는 왕세자의 연설은 담담했다.
절도 있는 움직임으로 Union Jack기(旗)가 내려오고 오성기(五星旗)와 홍콩 SAR기 (Bauhinia花)가 올랐다.
자정을 넘어 왕실의 요트는 영국 군함의 호위를 받으며 빅토리아 만(灣)을 떠났다. 빅토리아 만(灣)의 물결에 비친 불빛이 비바람에 몹시 출렁거리고 있었다.
*세월 따라.. <20>은 상하이(上海) 편으로 발행할 예정입니다.
1997.6.30 홍콩반환식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