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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정민 Apr 18. 2020

발악의 연속 속에서

때때로 머리 어디쯤에 내 의지와 상관없이 꽃이 한송이 꽂힌다. 남들 눈엔 보이지 않지만 내 눈에는 보이는 꽃. 아, 가끔은 눈치채는 것 같기도 하다. '어쩌다가 쯧쯧' 하는 소리 없는 안타까움이 그들의 눈빛에서 고스란히 느껴질 때가 있으니깐. 그도 그럴 것이 내 행색이 영 못 봐줄만할 때가 많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는 생략한 채(저녁에 씻었고, 어디 나갈 때도 없으니..) 로션 하나 대충 바르고, 뭘 해도 걸리적거리는 머리카락은 대충 추켜 묶어 버린다. 하루 종일 애 둘과 집에서 푸닥거리를 해야 하는 내 신세가 조금은 안쓰러워 뭐라도 나를 위한 선물을 하나 하자고 생각한 게 잠옷이었다. 잠옷이라도 예쁜 걸 입고 있어야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아 큰 마음먹고 비싼 잠옷을 샀는데, 금세 무릎이 툭 튀어나오고 군데군데 아이의 토사물과 침이 묻어 있다. 정작 토를 한건 아기인데 어째서 냄새는 내 몸에서만 나는 것인지. 대충 어깨춤을 끌어당겨 냄새를 킁킁 맡는다. 분명 섬유유연제로 향기로웠던 잠옷이었는데.

'야, 이건 너한테 사치거든?' 잠옷이 약 올리는 것만 같아 괜히 심술이 난다.

'비싼 값도 못하는 주제에.'


살면서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일이 어찌나 많던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라 생각하며 내 인생에 들어온 새 생명의 평안과 안녕을 위해 불철주야 들고뛴다.

분유를 들고뛰고, 기저귀를 들고뛰고, 가끔은 애 보다가 내가 굶어 죽을까 봐 밥 한 숟가락 입에 쑤셔 넣으며 뛰어다니기도 한다. 엄마가 밥을 편하게 먹는 꼴을 너그러이 봐주지 않았던 두 녀석들 때문에.

우아한 백조 같은 엄마가 되고 싶었는데, 비록 발은 바둥바둥 쉬지 않고 물을 저을지언정 아름답고 싶었는데, 그런 나의 환상은 정말 환상에 불과하다는 걸 신생아 둘이 우리 집에 온 그날 저녁, 바로 깨달았다.

버둥거림은 처절한 발악이 되었다. 

엄마의 뱃속에서 둥둥 떠다니며 편안하게 지내다가 세상에 태어난 아이 역시 빛과 소음 그리고 알 수 없는 무언가로 가득 찬 새로운 환경과 하루가 다르게 느끼는 제 안의 욕구에 맞서기 위해 최선을 다해 울고, 웃듯

엄마가 된 나도 엄마로 살기 위해,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일을 해 내기 위해 매일 같이 발악하며 지내게 된다.

아이는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엄마인 나는 아이와 아이를 키우는 삶에 익숙해 지기 위해 때때로 처절해진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세상 많은 일이 그러하듯, 이 일 역시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분명히 어제와 비슷한 하루를 보냈는데 어제는 발악으로 얼룩졌던 하루가, 오늘은 세상에서 다시없을 순간을 발견한 하루가 된다.  울음과 발악으로 점철되어 있던 이유식 시간의 혼돈이 어느새 평화와 웃음으로 변화하고, 그 안에서 '내 새끼 입에 밥 들어가는 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라는 걸 깨닫는 것처럼.


안타까운 건 육아라는 것이 익숙해질 만하면, 이대로라면 해볼 만하지! 하고 자신감이 어깨에 가득 차오르기라도 하면 괘씸하다는 듯 또 다른 새로운 문제가 튀어나오는 점이다. 경험하지 못한 또 다른 문제가.

'어디 그렇게 편하게 애 키우려고?' 그러면서.

그럼 난 또다시 발악을 한다. 익숙해지기 위해, 적응하기 위해, 엄마로 살아내기 위해.

발악의 시간이 발견의 순간으로 변할 때까지.


아이들이 네 살쯤 되니 발악하는 시간이 점점 짧아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몸이 지독하게 고생스러웠던 아기 시절과는 다르게 정신적으로 고통받아야 하는 순간이 생기긴 했지만.

게다가 엄마의 시간이 쌓여가니 '새로움'에 직면하는 나의 태도 역시 조금 의연해진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해서 발악의 시간이 아예 없어질 것 같진 않다. 서른이 넘은 동생의 결혼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엄마를 보며 엄마 노릇은 언제까지 이어지는 것일까 싶어 순간 눈앞이 캄캄하고 아찔했으니 말이다. (성인이 된 자식의 문제는 손 놓고 지켜보는 것도 엄마의 발악 중 하나인 것 같다.)


앞으로 내게 남은 셀 수 없는 발악의 시간을 생각하면 아득해지기도 하지만 그 보다 더 많은 순간, 자식 때문에 발견하게 되는 수많은 기쁨과 행복, 삶의 아름다움은 '엄마가 되길 정말 잘했어!' 하고 내게 이야기한다.

또각또각 구두를 신고, 나풀나풀 날아갈 것 같은 아가씨의 몸 사위를 보며 '예쁘다 정말' 느끼며 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쓱 훑어보게 된 날. 슬쩍 울적해진 기분으로 신발장에 박혀있는 구두를 가지런히 꺼내 놓기도 했는데, 결국 그건 여태껏 단 한 번도 신고 나가지 않았다.  

아이의 잰걸음에 덩달아 바빠지는 시간도, 다리가 아프다며 주저앉아 있는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가슴에 폭 끌어안고 길을 걷는 시간도 생각해 보면 그리 많이 남은 것 같지 않으니깐.(뭐, 전업주부가 딱히 구두를 신고 나갈만한 곳도 없었고) 

그리고 또 인생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은가. 내가 다시 구두를 신는 날, 너는 아 옛날이여를 외치며 운동화를 신게 될 테니. 슬쩍 악마 같은 미소를 지어 본다. (그렇게나마 스스로를 위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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