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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정민 Apr 19. 2020

막막한 바람과 설렘

아이가 20개월 정도 되었을 때였다. 여태껏 두 아이를 동시에 길러냈으면 됐다는 심정으로 어린이집을 알아보았다. 근 2년 가까이 거의 모든 시간을 너희에게 내어주었으니 하루에 네다섯 시간 정도, 엄마 좀 봐 주라는 심정으로. 가족 모두가 그러길 바라기도 했고. 

자유의 시간을 쟁취하기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나갈 무렵, 내 마음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마냥 흔들흔들, 휘청거렸다. 내 마음에 불어닥친 폭풍의 원인은 ‘직무유기 죄’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전업주부로 지내고 있으면서 어린 것을 어린이집에 보내는 건 직무유기 같았다. 

아이들이 어린 것은 둘째치고 집에서 놀고 있으면서 제 아이 기르는 것도 힘들어한다는 핀잔을 듣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내 주변엔 어린이집에 제발 좀 보내라는 아우성이 들끓어댔는데도 불구하고 모두가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는데, 어쩌면 그건 자격지심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이가 없이 보내는 낮 동안 ‘생산적인’ 할 일이 없다는 것이 내 알량한 자존심을 툭툭 건드렸다. 살림을 사는 것이 나의 천직이라 여겼던 마음은 그쯤 말끔히 사라졌다. 청소나 집안 정리 같은 일로 더는 성취감을 얻지 못했다. 그저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일. 딱 그 정도였다. 물론 한 달에 한 두어 번 대청소를 말끔히 하고 난 뒤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뿌듯함이 차오르긴 했다.(집을 완전히 뒤엎곤 했으니깐) 그러니깐 집안일로 내 존재 이유를 설명한다면, 한 달에 두 번 정도만 필요한 인간이 된 기분이라고나 할까. 

아이를 키우는 일에서는 여전히 내 존재가 마땅히 여겨졌다. 

아주 어린 이 두 아이에겐 엄마의 존재는 절대적이었으니깐. 아이가 나를 필요로 하는 딱 그만큼 나 자신을 인정할 수 있었다. ‘아이를 키우느라고’는 나에게 꽤 든든한 방어벽이었는데, 그 방어벽이 무너지려고 하는 것이다.

아, 인생의 허무함과 공허함. 


결혼하고 무겁고 갑갑한 갑옷을 벗어던지는 기분으로 사표를 냈다. 기쁜 마음으로 주체적 백조가 된 것이다. 직장을 잃는다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그 당시 나의 꿈은 내조 잘하는 아내, 현명한 엄마가 되는 것이었다. 꿈길에 진입했으니 그 기세가 위풍당당했다. 

그 당시 자영업을 하고 있던 남편을 도왔다. 혼자 집에 내도록 남겨지지 않았기 때문인지, 비록 남편의 사업장이긴 하지만 어쨌든,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예전 직장에 대한 미련 같은 것은 없었다. 가끔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유치원 버스를 타고 있는 아이를 만날 때면 옛 생각에 미소 지어지긴 했지만.


그랬던 내가 언제부터 ‘주부’로만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걸까. 

아니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대로’ 더는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걸까.

살림살이만으로 위풍당당하던 나의 그 기세가 언제 와르르 무너져 버린 것일까. 

도대체 왜 나는 나의 꿈이라 여겼던 주부라는 역할에 짜릿한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일까. 

게다가 언제까지나 내 존재의 모든 이유가 되어줄 것 같았던 아이마저 ‘엄마, 난 이제 엄마 없이 다섯 시간이나 혼자 있을 수 있게 되었어요~’라고 홀연히 독립할 수 있다니. 고작 20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낸 날 드디어 혼자만의 시간이 생겼다는 짜릿함과 함께 상실감을 동시에 느꼈는데, 아이가 나에게 의존했던 것만큼 나 역시 아이에게 내 존재의 가치를 증명받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처음 ‘쌍둥이 엄마’라는 역할이 나에게 주어지고 난 후 대부분의 날을 기쁜 마음으로 육아를 했다. 

아이가 막 태어날 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나의 꿈은 ‘현모양처’였으며 원래부터 아이를 좋아했기 때문에 비록 두 아이를 동시에 길러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마음이 뒤틀리거나 부대끼지 않았다.

나의 모든 시간을 아이에게 쏟아부으면서 헥헥 거릴수록 존재 이유가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나의 쓸모가 여기에서 빛을 발하는구나 싶어서.

집안에서도, 밖에서도 드높은 입지를 가질 수 있었다. ‘쌍둥이씩이나 키우니깐’

언제까지나 그럴 줄로만 알았다. 아이를 키우고, 남편 곁을 지키는 일 외엔 그 어떤 것에도 마음이 들뜨지 않으리라고. 그런데 웬걸. 내 마음이 내 계획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인생이란 참, 한 치를 알 수 없어서 괴롭고 또 그렇기 때문에 재미있기도 하지.


주부의 시간으로 나의 모든 삶을 채우고 싶지 않으며, 나의 진짜 꿈은 ‘현모양처’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의심이 막 피어났던 건, 아이가 18개월 지났을 무렵이었다. 내가 곰처럼 무딘 인간이었다면 그 당시 내 마음속 혼란스러움을 ‘18개월 아들 쌍둥이를 키우는 엄마의 흔한 괴로움’쯤으로 치부하고 말았을 거다. 다행스럽게도 아이를 낳고 취미로 삼은 독서는 넌지시 알려주었다.  ‘육아의 고됨’ 때문이 마음이 힘든 것이 아니라고. 

혼란과 심란의 계기가 ‘글을 쓰고 싶다’라는 막연한 바람 때문이라고. 하고 싶은 새로운 일이 생긴거라고.


막막한 새 길의 발견과 희뿌연 바람 그 사이.


3년도 채 살지 않은 아이조차 엄마 없이 다섯 시간이 나 보낼 수 있다. 

13살 정도 되었을 땐 엄마와 눈을 맞추고 다섯 시간을 보내자고 하면 기겁하고 도망가지 않을까.

아이가 순수하게 ‘엄마의 시간’만을 필요로 하는 때도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을 하니 내 마음이 갑자기 바빠지는 것이다. 

‘그 길 아니래. 주소가 잘 못 됐데.’ 


꿈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던 순간, 그러니깐 가정이 생기고, 엄마가 되었으니 어쩌면 이루고 싶은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기뻐하던 그 순간, 우르르 쾅! 하고 내 안에 번개가 내리꽂혔는데, 그 번개의 출처가 ‘아이’라는 생각에는 여전히 조금도 의심을 하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이를 키우는 이 일만큼 민낯의 나를 보게 만드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뭐, 매일 쌩얼의 향연이었던 것을 말할 것도 없고, 감정마저 날 것 그 자체로 날뛰게 만드는 힘, 들여다 보지 않은 내 안 깊숙한 곳까지 내려가게 만드는 힘이 솜털조차 순결무구한 이 어린 핏덩이에게 있었다. 

아이를 향해 사랑을 외칠수록 나 자신 또한 사랑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샘솟았고, 아이의 행복을 기도하면 할수록, 나의 행복이 아이의 행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가끔은 재가 될 정도로 애미의 마음을 타들어가게 만드는 아이에게 분노를 느꼈는데, 그럴 때면 어김없이 죄책감과 안쓰러움, 그리고 동정심 같은 것이 마구 솟구쳤다. 엄마는 이토록 불쌍해질 수도 있구나.

‘엄마 말고 딴 거 할래!’ 외쳐대며 하는 발악은 옵션. 그 발악이 반짝이는 발견으로 변하는 걸 몇 번 경험하고 났을 땐 그 발악까지 반쯤은 끌어안을 수 있었다. 

아이가 자신의 인생을 잘 살아내길 바라는 만큼 나 역시 내 인생을 잘 살아내야 한다. 아이를 사랑하는 것만큼 엄마인 자신을 사랑해 주어야 하는 것, 아이를 키우는 것만큼 중요한 엄마의 일 중 하나인 것이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기로 한 날, 다짐했다. 

‘쓰고, 쓰고 또 쓰겠노라.’ 

이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글이 아니어도 괜찮으니 일단 쓰자고. 그게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라면 그렇게 하자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꽉 끌어안아 주자고. 

오랫동안 나를 끌어안아 주고 싶도록, 조금씩이라도 지금의 나를 넘어서 보자고. 

엄마라는 웅덩이로 내 모든 것을 설명하지 말자고. 

나는 나조차도 그 깊이와 넓이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다일지도 모르니깐. 

그렇게 나 자신에게 자유를 선물해 주었다. 어디든 흘러가보자고. 그래도 괜찮다고. 


어쩌면 ‘그냥 엄마’로만 살아가는 삶을 살았더라면 들끓는 답답함이나, 애타는 간절함,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그 때문에 느끼는 민망스러움, 자책 같은 것들을 느끼지 않아도 됐을지 모른다. 

공모전에 보낸 숱한 나의 글은 도대체 어떤 취급을 받고 어떻게 버려졌을까 상상하며 씁쓸해하지 않아도 됐을지 모른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세상에 한 걸음씩 발을 뻗칠 때마다 자존감이 내 안에서 빠져나가는 꼴을 보지 않아도 됐겠지.

애 둘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데 조금 더 나은 인간으로 살아보겠다는 다짐조차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나는 지금 무얼 하는 짓인가 싶어 한참을 멍한 상태가 되고 했다.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은 결국 잘 해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구이기도 하니깐.


막막한 바람 앞에서

설렘을 느끼다. 


링 위에 올라가 만신창이가 되도록 두들겨 맞아놓고서도 내일 아침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날카로운 눈빛과 불끈 쥔 두 주먹을 장착하고 훈련에 임하는 선수처럼, 행방이 묘연해진 글 때문에 내 마음 곳곳이 눈탱이밤탱이가 되어도 다음 날 아침이면 조용히 책상 앞에 앉았다. 내가 쓴 글과 유명한 작가의 글을 비교할 때면 말할 수 없는 처참함을 느끼면서도 아이들을 옆에 눕혀놓고 재우면서 내가 쓴 글을 읽곤 했다. 뿌듯하고 기특한 마음으로. 


이제는 나에게 ‘있는 그대로의 나’는 지금의 내 모습 그 자체만을 뜻하지 않는다. 

벌써 씩씩하게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조그마한 세 살조차 자신을 넘어서며 자라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엄마인 나 역시 이대로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한다고 나도 모르게 결심하게 된다. 

언제까지나 아이들을 방어벽 삼아 나의 존재를 설명하지 말아야 한다고.

아이들이 하나씩 자신의 일을 해내는 것처럼, 나 역시 그러자고.

수험생이 된 아들이 ‘엄마, 지금 저 정말 중요한 때거든요?’라며 뻐기려 들려고 할 때, 더 일찍 일어나 책상 앞에서 글을 쓰고 책을 읽어야지. 눈을 비비며 서재에 들어온 아들에게 보란 듯이 콧방귀 한번 픽 하고 껴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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