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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정민 May 03. 2020

같이의 발견

                                                                                                                                                                                                                                                                                                                                                                                                                                                                                                                                                                  




"쌍둥이들은 ‘싫어병’에 안 걸렸어? 쟤는 눈 뜨자마자 싫어! 라고 이야기해."


이제 막 말문이 트이기 시작한 아이가 자신의 의사 표현을 곧잘 하나 보다. 울음과 괴성으로 의사를 표현하던 아이가 말을 배우면서부터는 비록 서툴지만 분명한 언어로 생각을 내뱉기 시작하는데 그 말이 긍정어이면 긍정어인 대로, 부정어이면 부정어 인대로 부모는 움찔 놀라고 만다. 어느 때엔 경의와 신비로움으로, 또 어느 때엔 기막힘으로. 


‘싫어!’와 ‘싫어?’ 


같지만 다른 악센트 차이에, 그 한 끗 차이에, 아이의 입속으로 머릿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을 지경이다. 


“도대체, 어떻게 말을 배우는 거야.”




말을 하게 되는 그 순간부터 아이와 나 사이엔, 그리고 아이와 세상 사이엔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 같다. '소통'이 된다는 것이 이토록 대단한 일이었다는 걸 말문이 트인 아이를 통해 깨닫는다. 물론 그전엔 아이의 눈빛, 몸짓, 표정을 통해 비언어적 소통을 했다. 그러니 단절된 채 지낸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언어가 우리 사이를 훨씬 명징하게 만들어주었다. 그 분명하고 명확한 태도에 때때로 화가 솟구치기도 하지만 확실한 건 이전보다 우리의 관계가 돈독해졌다는 것이다. 마치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 어느 마을에서 나와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을 만나게 된 기분이랄까. 눈빛과 몸짓과 표정에 언어까지 더해지니 그동안 우리 사이를 가로막던 장애물이 드디어 걷힌 것 같아 후련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싫어!'라고 말하는 아이의 그 입이 얄밉지만 기특하다. 원하지 않을 땐 '싫어'라고 이야기하면 된다는 걸 알아낸 아이가 대견하기도 하다. 울컥 '왜 싫은 거야! 싫다고 좀 하지 마!'라고 소리치고 싶다가도 이내 그 말을 꿀꺽 삼키는 이유는 엄마가 없는 곳에서도 자신의 의사를 말로 똑똑히 전달할 수 있게 된 아이에 대한 나지막한 응원이다. 




나의 두 아들은 똑같은 개월 수임에도 불구하고 말을 습득하는 속도가 확연히 달랐다. '엄마, 축축해요.'라는 둘째의 말에 화들짝 놀라 다시 말해보라고 시키기도 했다. '축축해요.'라니. 옷이 물에 젖었을 땐 '축축'이라고 표현한다는 것을 눈치껏 깨달았을 둘째 아이가 귀여워 한참을 웃었다. 그 외에도 둘째의 말은 대체로 문장형이다. '엄마, 바퀴가 빠졌어요.' '할아버지가 아파요?'와 같이. 


짧은 문장이지만 그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오밀조밀 움직이는 아이가 참으로 예뻤다. 그에 반해 첫째 아이는 말 자체를 잘 하지 않았다. 생떼 또는 막무가내가 그의 시그니처. 게다가 가끔 하는 말도 발음이 정확하지 않다. '나도요'를 '미요'라고 하고 '주스'를 '뚜뚜'라 한다. 한밤중에 '잇티'를 외치며 우는 아이 때문에 곤욕을 겪은 적도 있다. '잇티'가 도대체 뭔지 몰라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아이 앞에 가져다주었는데 알고 보니 '잇티'의 정체는 '팬티'였다. 


그런 아이가 아주 정확하게 표현하는 한 문장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아빠 같이 가요'다. 


아빠가 아침에 출근이라도 할라치면 어김없이 소리를 지른다. '아빠, 같이 가요. 같이' 화장실에서 큰일을 보고 있는 아빠를 향해서도 '아빠, 같이요!'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문득 보여주고 싶은 것이 생기면 손을 이끌면서 '아빠, 같이 가요.' 하고 이야기한다. 


집에 놀러 온 할머니가 돌아가려고 하면 문 앞에 서선 '같이요. 할미 같이요' 하며 문을 막고, 할아버지를 우연히 만나도 다짜고짜 '같이'를 외친다. 


그러고 보면 우리 두 아이는 '싫어'라는 말보단 '같이'라는 말을 훨씬 더 많이 했다. 물론 '같이'라는 말보단 울음과 괴성을 더 많이 내지르긴 하지만….




하긴, 뱃속에서부터 늘 들어왔단 단어였으리라. 


'엄마 배 속에 둘이 같이 있으니 좁지?' '둘이 같이 뭐 하고 놀고 있어?' 


태어나기 전부터 같이 붙어 있던 아이들이었다. 태어나고 나서도 다를 바 없었다. '그건 같이 먹는 거야!' '그건 같이 가지고 놀아야지' '같이 나란히 앉아봐.' 


그러니 아이들이 '같이'라는 말을 자연스레 많이 한 건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너무 많이 들어서, 또 너무 많이 내뱉어서 아무런 감흥도 없었던 '같이'라는 말에 멈칫했던 건 어젯밤이었다. 




침대 두 개를 붙여 놓고 네 명이 나란히 누워서 잠을 잔다. 첫째와 남편이 한 침대에, 그리고 둘째와 내가 나머지 침대에. 어제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누워서 잠을 청했다. 마침 남편이 외출 중이었다. 첫째는 아빠가 없어도 혼자 자신의 자리에서 곧잘 자곤 했다. 그런데 어제, 첫째가 나즈막히 "엄마, 같이요." 하며 품을 비집고 들어왔다. 


첫째와 함께 들어온 '같이'라는 말이, 그 말과 함께 전해진 아이의 따스한 온기가 불현듯 내 심장에 쿡 하고 박힌 것이다. 아무것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둠은 내 모든 감각을 더욱 생생히 살려내곤 하니깐. 


특히 밤에 더욱 풍성해지는 감수성이 그러했으리라. 




우린 가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수많은 것들을 공유하며 지낸다. 똑같은 비누로 손을 씻고, 똑같은 치약으로 양치질을 한다. 첫째 아이는 치열까지 아빠를 쏙 빼닮았고, 두 아이의 조그마한 코는 꼭 나를 닮았다. 손톱 발톱에까지 아빠의 유전자가 관여해서 그들 셋은 크기는 다르지만, 모양은 똑같은 손톱 발톱을 가졌다. 생활 방식도 식성도 닮아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인 것은 아니다. 


확실히 다른 네 명의 사람이 한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다. 남편과 나는 이제 겨우 7년 차 부부다. 각자의 부모 밑에서 태어나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랐다. 그러니 똑같은 구석보단 다른 구석이 훨씬 더 많다. 우리 둘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 아들은 더욱 희한한 것이 쌍둥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성격도, 생김새도 다르다. 기질적으로 둘째는 순하게, 첫째는 민감하게 태어났는데 4살이 된 지금에도 여전한 것 같다. 어쩔 땐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남편과 아이의 모습에 낯설어지곤 하는데 그들도 역시 나를 보며 그러한 생각을 했을 것 같다. 


가족이라는 소속감은 말도 못 하게 단단하지만, 그 소속감이 우리를 같은 모습으로 만들 순 없다. 그것은 분명히 교집합의 모습이다. 우리 네 사람이 가진 공통의 무엇이 존재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 부분을 뺀 나머지는 제각각 다른 모습인 것이다. 


그 밤, 아이의 '같이'라는 말이 사무치게 들렸다. 그 말이 일순간 반짝, 빛을 내뿜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토록 다른 우리가 만났다. 부모 자식 사이는 천륜이라고 하지만 그 천륜조차 우리 넷의 독립성을 하나로 섞진 못한다. 그러니 한 공간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사는 우리가 평화로울 수 있는 이유는 모두 같기 때문이 아니라 '같이의 가치'를 잘 알기 때문이리라. 




참 좋아하는 동요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코끼리 아저씨와 고래 아가씨' 다. 아기들이 신생아였을 때, 자장가로 곧잘 불러주곤 했다. 


화창한 봄날에 가랑잎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가던 코끼리 아저씨가 바닷속에 사는 고래 아가씨를 만난다. 그 둘은 첫눈에 반하여 결혼한다. 육지 멋쟁이와 바다 예쁜이의 결혼식. 용궁예식장에 피아노는 오징어가 쳐 주는 거창한 결혼을 하지만 나는 늘 의문스러웠다. 그 둘이 도대체 어떻게 살지? 코끼리 아저씨가 사는 육지에선 고래 아가씨가 살 수 없고, 고래 아가씨를 따라 코끼리 아저씨가 바다로 들어가면 분명 코끼리 아저씨가 숨을 쉴 수 없을 텐데. 


둘은 이제 어쩌나 큰일 났다며 농담으로 남편에게 이야기하곤 했다. ‘서로 다른 존재가 어떻게 결혼을 할 수 있는 거야!’ 그러면서. 




함께 사는 가족은 '같은' 모습이어야 되는 줄 알았다. 비슷하게 닮은 모습처럼, 생활방식처럼 생각도 태도도 비슷해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가족 사이의 삐걱거림은 '같음'을 강요하는 그 순간 솟구치는 것이라는 걸 이제야 어렴풋이 알아가고 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존재다. 마치 코끼리 아저씨와 고래 아가씨처럼 말이다. 아마 그 둘은 조그마한 섬을 샀을 것이다. 그리고 코끼리는 섬에서 고래는 그 섬 주변에서 지내며 종종 같이 있는 순간을 즐겼을 것이다. 다르다는 걸 둘 다 빠르게 인정했기 때문에 그 둘은 평생 행복하게 살지 않았을까. '같이의 가치'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감사에서 비롯된다. '같이'가 '똑같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순간, 상대가 곁에 있다는 그 자체 하나에 감사함을 느끼는 순간 '같이'라는 그 말은 비로소 '축복' 이 되고 '기쁨'이 된다. 


아이들이 늘 내뱉었던 '같이'는 언제나 ‘존재 그 자체’를 향해 있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요구하기 위해 뱉은 말이 아니라 단지 함께하고 싶다는, 그것 하나면 충분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앞으로 숱한 순간, 아이와 남편을 향해 핏대를 세우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세우겠지.


'내 뜻대로 움직여주길 바란다.'는 말이 하고 싶어서. 하지만 그때마다 떠올리려고 한다. 그저 같이 있음에 기쁨을 느끼던 아이의 모습을. 나와 같은 생각을 해 주길 바라는 것은 지극히 욕심이자 이기심이라는 것을.


우린 존재 자체만으로도 서로에게 더할 나위 없이 가치로운 존재이니까, 그저 같이의 가치에 집중하며 살아가는 것에 집중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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