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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정민 Jun 04. 2020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패배자


                                                                                                                                                                                                                                                                                                                                                        엄마를 온전히 필요로 했던 아기 시절. 그러니깐 엄마 없인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그때. 

내 모든 시간을 아이에게 내줘야 한다는 억울함과 두 아이의 본능과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부지런히도 움직여야 했던 고단함으로 몸과 마음이 피폐해 졌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나의 쓸모를 인정받는 듯한 기분이 들어 약간은 우쭐했던 기억이 있다. 


며 칠은 감지 못 한채 대충 쓸어 위로 묶은 머리카락과 매일 같이 멱살을 잡히는 바람에 있는 대로 늘어나 버린 티셔츠. 무릎이 툭 튀어나온 잠옷 바지와 생기라곤 하나도 없는 표정을 장착한 채 지낼 만큼 온전히 나를 놓아버린 상태였지만 '내가 없으면 이 아이들은 어떡하라고!' 하는 사명감 깊은 마음 덕분에 하루, 하루를 버텨낼 수 있었다. 


이 낯선 세상에, 부모 하나 믿고 태어난 핏덩이들이 가엽고 기특하여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끝내 일으켜 세우곤 했다. 


"나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것들!"


자비라곤 없는 육아의 노동 사이에서 허덕이면서도 나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겨져 괜히 뿌듯했다. 


조그마한 아이 옷을 삶고, 젖병을 소독하고, 이유식을 만들면서 그 바쁜 틈에도 사진을 찍으며 약간의 즐거움을 느낀 이유 역시, 두 아이를 위해 이 정도의 정성을 들일 수 있는 사람이라곤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는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뭐, 그렇게라도 생각해야지만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일 수도 있고. 



"너도 나 없으면 안 되겠지?" 


나를 보고 배시시 웃는 아이를 보면서 괜히 의기양양해지곤 했었는데,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때엔 눈으로 나를 쫓고, 바동바동 길 수 있게 되니 내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아이를 보면서 괜히 우쭐했다. 

아이가 나에게 주는 거라곤 환한 미소와 존재 자체의 귀여움뿐. 늘 울고 보채며 무언가를 요구했다. '난 엄마가 없으면 단 한순간도 살수 없어요!'라고 눈으로 마음으로 외치는 것 같았는데, 그때 아이에게 받은 깊은 애틋함과 사랑을 잊지 못한다. 이 녀석들은 도대체 언제 자랄까! 하는 한숨 섞인 탄식은 그렇게 사랑에 희석되어 옅어지곤 했다. 

겉으로 보기엔 엄마인 내가 늘 주기만, 아이는 받기만 하는 처지였지만 그 시절, 나는 아이에게 온전히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그 혹한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고 했던가. 비단 남녀 간의 사랑에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라는 걸 깨달은 건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나면서부터였다.  저 또한 독립적인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아이는 점점 나의 손아귀를 벗어나고 싶어 했는데, 딱 그만큼 나에게 향하던 마음이 세상으로 흘러간 것이다. 

사랑은 받을 때 보다 줄 때, 그 진정한 의미를 짙게 느낄 수 있다고 하지만, 그건 머리로 생각하는 사랑일 때 그렇고.

난 언제나 사랑을 받는 순간이 훨씬 기뻤다.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기분, 누군가로부터 온전한 지지를 받는다는 느낌, 누군가에게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좋았다. 


나 혼자만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기면 그때부턴 마음이 시름시름 앓으며 힘을 잃곤 했고, 그가 나에게 주는 사랑보다 내가 그에게 주는 사랑이 훨씬 크다는 걸 알게 되는 날엔 세상에 버려진 것 같은 심정을 느끼곤 했다. 

후회 없이 사랑한 사람만이 그 사랑의 진정한 승리자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막상 사랑 한가운데 놓이게 되면 그가 나를 향해 무한한 사랑을 주길 바랐다. 내가 주는 사랑보다 그가 나에게 주는 사랑이 훨씬 크길 바랐던 것이다.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패배자, 덜 사랑하는 쪽이 승리자라는 말이 있는데, 난 승리자가 되기 위해 굉장히 새침을 떨었던 것 같다. 물론 새침을 떤다고 해서 늘 승리자가 된 건 아니었지만.

이젠 한 사람의 아내가 되어 그러한 사랑놀이는 사치스럽게 여겨질 때가 많지만 그래도 틈만 나면 남편 앞에서 먹히지도 않을내숭을 떨게 되는데, 세월이 흘러도, 애 둘 낳은 엄마가 되어도 여자이기 때문이려나. 

'네가 날 더 많이 사랑했으면 좋겠어!'라는 무언의 발악쯤. 


늘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내가, 더 많은 사랑을 주고 싶다고 생각했던  존재는, 아이가 유일했다. 

내 안에 모든 사랑을 내 주기 위해, 사랑이라는 마음의 창고에서 뭐라도 하나 더 꺼내주기 위해 바둥거리게 된 건 정말, 이 두 생명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엄마가 없인 단 한순간도 살 수가 없어요'라며 애처롭고 아련한 모습으로 나만 쫓던 녀석들이 어느새 자라

"이젠 엄마 없이 이런 것도 할 수 있거든요?'라는 얄미운 표정과 행동을 보이게 되는 순간이 찾았을 때. 

이젠 내가 아이의 모든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을 때. 

아, 이젠 엄마인 나만을 향하던 사랑이 조금씩 자신의 세상으로 흘러들어가겠구나 예감하면서도 동시에 '그런 것까지 할 수 있다니!' 하고 활짝 미소 지으며 손뼉을 치게 되는데,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되는 순간이라고나 할까. 


나 없으면 이 세상이 무너질 것 같다는 듯 울며 불며 어린이집에 갈 땐 언제고, 어느새 자라 어린이집에서 사귄 여자친구와 손 꼭 잡고 웃고 있을 때, 놀이터에서 더 놀고 싶으니 엄마 혼자 집에 가라고 소리칠 때, 제가 원하는 것을 해 주지 않는다고 '흥, 칫!' 하고 고개를 픽 돌릴 때. 아이의 성장, 그 아름다운 몸짓에 황홀해 지다가도 점점 가벼워지는 엄마를 향한 아이의 마음에 괜히 섭섭해 지곤 한다. 물론 지금이야 섭섭함보단 귀여움을 훨씬 더 많이 느끼지만 세월이 지나고 아이가 자랄수록 섭섭함의 농도는 더욱 짙어질 거란 걸 부정할 수 없어 괜히 마음 한 켠이 시린 것이다. 


그 가슴 시림 안에는 여러 가지 감정들이 뒤섞여 있는데, 나 역시 내 부모님의 자식이기도 했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이라고나 할까. 

'내가 알아서 할게!' '그냥 좀 놔둬.' '언제까지 참견할 거야?' 와 같은 독설로 내 부모의 사랑에 돌을 던지곤 했는데, 아! 이젠 내 차례가 되었구나 싶은 것이다. '제발 나보다는 좀 덜해줘라'라고 부탁하고 싶어진다. 


사랑의 밀당. 연애할 땐 물론, 결혼 생활에서 남편과의 사이에서도 가끔 쓰기도 하고, 자식과의 관계에서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생각은 하지만, 아마 아이와의 밀당에선 내가 항상 질것 같은 예감이 든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는 말에 동의하기도 하지만, 사랑받고 지지 받은 사람이 가진 아름다운 빛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누군가에게 무한한 사랑, 묵직한 지지를 받고 살아온 사람만이 가지는 환한 아우라를 내 아이 역시 갖고 살아가길 바라기 때문이리라.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패배자라고 하지만, 자식 앞에서는 영원히 패배자여도 좋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구김 없이 환한, 사랑을 받아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눈부시게 빛나는 기운을 내 아이에게 불어 넣고 싶은, 엄마의 마음인 것이다. 


물론 무작정 사랑만 주어야겠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부모로서 지켜야 할 가장 큰 도리는 자식이 올바른 가치관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니깐. 때문에 옳지 못한 것에 대해선 단호하고, 냉정해질 수 있어야 한다. 

엄마, 아빠만은 내 편이라는 불패의 자신감을 가지기 위해선 '인간으로서 옳고 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쯤은 알았으면 좋겠다. 옳은 인간이 어떤 인간이냐고 묻는다면, 난 '건전하고 성실한 인간'이라고 대답해 줄 것 같다.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삶에 진전이 있는 인간.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 성실하면  된다고.

그러기만 한다면 엄마를 향한 사랑의 무게가 깃털만큼 가벼워진대도 괜찮다고 말할 것이다. 

그것에 대한 섭섭한 마음이야, 부모인 내 몫이니깐. 내가 알아서 잘 처리할 거라고. 내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나와 눈 마주치며 그러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

엄마의 마음을 담담하게 고백할 수 있게 되기까지 거친 파도의 시간을 견뎌내야 하겠지. 

내가 저질렀던 수많은 만행들이 떠올라, 괜히 아들의 사춘기가 덜컥 겁이 나지만 '네가 한 죄를 알렸다'라는 마음으로 버텨내는 수밖에 없겠지. 

그러면서 파도의 시간을 잘 헤쳐나가기 위한 묘책이 있으려나 가만히 생각해 본다.  

'약간의 무관심과 큰 사랑' 

에잇! 결국 짝사랑을 신물 나게 하겠구나 싶어, 쓴웃음이 나온다. 


기다려주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나와 남편이 그저 서로의 삶을 옳고 바르게 살아기기만 한다면 자식 역시 그 궤도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믿음으로.  

우주의 중력에 의해 우리가 땅 위에 두발 딛고 서서 다니는 것처럼, 부모의 옳은 삶이 자식을 바른길로 끌어당겨 줄 거란 확신으로.  

결국 나부터 잘 살라는 말. 


고작 네 살 아이와의 밀당 앞에서 진 후에, 이런 긴긴 글을 쓰며 마음을 달래는 인간이 나라는 생각이 들어 갑자기 웃음이 터진다. 벌써부터 이러면 난 앞으로 수십 권의 책도 쓸 수 있겠구나 싶기도 하고. 

주기만 한다 해도, 돌아오는 것이 주는 것에 비하면 아주 미미할지라 해도 끝내 주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부모니깐. 엄마니깐. 

많이 사랑해 주고, 끝까지 믿어주려 노력해야지. 

자식이니깐. 

사랑받은 이만이 뿜을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환한 빛을 내 아이의 몸 구석구석에서 새어 나오길 바란다. 

그런 의미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패배자가 있다면, 단연코 부모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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