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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정민 May 28. 2020

아이와 나의 적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장목'면' 장목'리'. 


작은 마트도 있고, 병원도 있고, 약국도, 은행도 있어 옆 마을 어르신들이 아침만 되면 버스를 타고 이곳으로 오신다. 


처음 이사를 왔을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너무 아무것도 없는 시골 아니야?" 


남편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이곳이 이래 보여도 할머니들에겐 핫플 같은 곳이야."



결혼 후 3년 동안 부산 덕천동에서 지냈다. 시내 한복판에서 살았기 때문에 웬만한 곳은 걸어 다닐 수 있었다. 


은행, 병원, 요가센터, 취미활동으로 다녔던 미싱 학원에 쇼핑센터, 카페거리까지.  불편할 것 하나 없었다. 심심한 날이면 집 앞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가만히 구경하기도 했고, 길거리 가게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산책하기도 했다. 


만약 아이를 낳은 후 이사를 가게 되더라도, 주변 풍경은 달라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아파트 단지 내에 유치원과 학교가 있는 곳, 되도록이면 편의시설이 많은 곳으로 이사를 가겠거니. 


지금 나는 애초 계획했던 것과 완벽하게 다른 곳에 살고 있다. 


아, 아이를 키우기 좋은 곳에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는데, 다른 의미로 이곳은 아이를 키우기 좋은 곳이기도 하니 아주 완벽하게 다른 곳은 아니라고 해야 하나...




어린이집을 어디 보내야 좋을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딱 한군데 밖에 없으니깐.


동네에 하나 있는 초등학교 안에는 유치원도 있는 것 같은데, 난 그곳에서 아이가 하원 하거나 등원하는 걸 단 한 번도 내 눈으로 본 적이 없다. 타이밍이 안 맞는 건지 타이밍을 맞추기 힘들 만큼 아이 수가 적은 건지..


초등학생도 드문드문, 듬성듬성. 큰 운동장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의 수를 재빠르게 세면 전교생이 몇 명인지 쉽게 알 수 있을 정도. 


그런데도 학교에는 커다란 스쿨버스가 2대나 있었는데, 학교가 아예 없는 마을에 사는 아이들이 이곳으로 등교를 한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비교할 일은 없겠다고 생각했다. 


워낙 귀가 얇아서, 마음이 갈대보다 더 자주 흔들리곤 해서 엄마로서의 내가 걱정스럽기까지 했는데 뜻밖에 고민이 해결되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좋겠거니 하며.


내가 사는 근처엔 도시에서 은퇴하고 시골로 이사 온 이모, 삼촌들 뿐이니 엄마의 정보통은 늘 텅텅 빈 상태가 될 수밖에 없지만 반대로 속 시끄러운 일 같은 것도 하나 없었다. 


남의 집 엄마와 나를 비교하며 속 끓을 일 같은 것도, 다른 집 아이와 내 아이를 견줘보며 애닳을 일 같은 것도 이곳에선 차단할 수 있다. 비교도 누군가가 있어야 가능한 일 아니던가. 



함께 아이를 키우는 누군가가 주변에 없다는 것은 허전한 일이지만, 이렇게 되고 보니 오히려 잘 됐다 싶었다. 


내가 나를 잘 아니깐. 이건 하늘이 나를 도우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냄비 같은 내 마음이 끓어오를 일 같은 건, 비교하며 애태울 일 같은 건 애당초 없겠구나 싶어서.



그런데 아차.


개월 수가 똑같은 두 아이가 동시에 태어난다니. 게다가 성별까지 같다. 


비교 없는 삶을 살겠구나 싶었는데, 딱 비교하기 좋게 아이 둘이 태어난 것이다. 


마음에 비상등을 켰다. 깜빡깜빡. 비교하지 말자. 두 아이를 나란히 놓고 이리저리 재는 일 같은 건 처음부터 하지를 말자. 그것이 얼마나 무용한 일인지,  끔찍한 일인지, 잔인한 짓인지 잘 알지 않느냐며. 


소속감 속에서 자기들끼리 고만고만한 경쟁을 하며 크는 것은 문제가 없을지 모르지만, 부모인 내가 나서서 아이를 자로 재듯 재단해 버리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인것 같았다. 아니 그건 분명 옳지 못하다. 


아이 둘을 가만히 놓고 비교하는 대신 내 일이나 제대로 하자고 부추겼는데, 참으로 그게 마음처럼 되질 않는다. 



말을 먼저 튼 건 둘째였다. 두 돌이 훌쩍 지나서 갑작스레 말이 터지기 시작했는데 말을 하고 있는 둘째를 보고 있으면 기특함에 앞서 첫째는 말이 좀 늦구나! 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안타까운 마음이 쏟아내곤 했다. 


둘째가 빠르다느니, 첫째가 늦다느니. 이 얼마나 가치 없는 비교질인가. 그걸 잘 알면서도 그러고 있으니.


내 세상에 아이라곤 둘 밖에 없는 것처럼, 하나를 보고 나머지 하나의 상태를 판단하려 들었다.



밥을 지독하게 먹지 않으려고 하는 둘째에겐 "찬이처럼 빨리 좀 먹어 봐!"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았고 첫째에겐 "넌 옹이처럼 양보 좀 해!"라고 서슴없이 말하게 된다. 


객관적인 발달 사항 같은 건 생각지도 않은 채, 찾아보려고 하지도 않은 채 눈에 보이는 쟤를 보고, 내 앞에 얘를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데 이게 쌍둥이를 키우고 있기 때문인 건지, 내가 몹쓸 엄마인 탓인지 이젠 나도 모를 지경이다.


어차피 사회에 나가면 비교가 난무하는 상황 속에 놓이게 될 텐데. 부모마저 그럴 필요가 없을 텐데.



나는 왜 그럴까. 단단한 신념이라곤 없이 자식 앞에서 흔들흔들 갈대만도 못한 것일까.


비교할 다른 아이가 없으면 뭐해. 나의 두 아이를 놓고 저울질하고 있는걸.


그런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 호젓한 시간 가만히 생각해 본다. 


나라는 인간에 대해. 단단한 엄마가 되기 위한 방법에 대해. 아이와 내가 서로의 삶에 상처가 아닌 힘으로 존재할 방법에 대해.



나의 삶에  충만감을 갖기 전, 그러니깐 글을 쓰기 전에는 타인의 삶에 항상 내 눈과 마음을 빼앗겼다. 


그게 내 삶을 초라하게 만드는 짓이라는 걸 그땐 몰랐다. 남보다 잘난 구석을 만들기 위해 바둥거렸다.


그 잘난 구석이라는 것은 대체로 외적인 무언가였다.  


바깥으로 향하기만 하던 나의 눈과 마음을 내 안으로 끌어모아주었던 것이 바로 글쓰기와 책 읽기였다. 


중심이 단단해야 한다. 스스로에게 당당해야 된다. 그것이 제일 먼저인 것이다. 


그리고 꼿꼿하고 단단한 내 삶이 타인과 세상에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주 미미할지라도. 눈에 띄지 않을지라도.  


나 자신으로 향하는 길이 곧 타인 그리고 세상에 가닿을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단단한 엄마가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선 '당당한 나'가 되는 것이다.


타인의 삶을 우러러보며 나를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곧게 세운 내 삶이 세상 한 부분에 징검다리가 되는 삶. 


바등바등 노력한 나의 꿈으로 돈을 버는 삶. 소비할 때 보다 생산할  때 더 짜릿한 희열감을 느끼는 삶.


세우고 무너지기를 반복하면서도 끝내는 세우겠다는 다짐을 하는 삶. 자유롭게 사고하고 책임감 있는 행동을 하는 삶.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하다는 말을 '엄마가 꿈꾸는 삶을 살아야 아이 역시 꿈꾸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라고 마음대로 바꿔 마음 속에 저장해 두었다. 



하지만  다짐만으로, 이 정도의 노력만으로 부족한가 보다. 


한 인간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걸 스스로 느끼고 있으면서도, 나와 타인을 비교하는 것은 의미 없는 에너지 낭비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아이를 향한 내 마음의 비교는 쉽게 멈춰지지 않았다. 


도대체 왜 자꾸만 비교하려 드는 것일까. 



내 아이의 상태를 가늠하기 위한 둘러봄이 어느새 비교가 되어버리는 것에 가장 큰 원인은 '불안함'인 것이다.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어떻게 키우는 것이 맞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소중한 아이를 길러내는 일은 불안와 걱정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 비교의 끝은 항상 나에게로 향했다.  결국 난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쟤가 저 정도 밖에 안되는 건 결국 내 탓이잖아. 더 잘 했어야지! 더 신경 써줬어야지!'


그렇게 내 마음속 엄마라는 탑은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버린다. 불안의 힘은 이토록 크고 잔인한 것이다. 


나  때문에 아이가 제대로 못 컸다는 생각에 엄마가 무너지고, 아이는 엄마의 그러한 무너짐을 바라보며 같이 주저앉게 된다. 아이는 아이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슬픔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불안함이 다그침이 되고, 다그침이 아이의 마음에서 자기부정과 자기 불신 같은 검은 그림자를 피워내게된다. 


내 삶을 타인과 비교하고, 내 아이를 다른 아이와 비교하고, 나의 두 아이를 서로서로 비교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면 그 속에서 나의 아이는 무엇을 느끼며 배울 수 있을까. 


건강한 경쟁심이 아닌 질투와 시기, 불안과 불만, 부정 같은 것들이 마음속을 꽉 채우지 않을까. 



어떻게 해야 할까. 아이를 키우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는 걸 나는 이럴 때마다 절감하는데, 이것이 진정 엄마의 무게이구나 싶어 깊은 한숨이 나올 때가 있다.  


무작정 믿으라는 말, 무턱대고 비교하지 말라는 소리 같은 건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비교하지 말아야지, 믿어줘야지. 이미 마음으로 수천 번 수만 번 되뇌고 있으니깐.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리곤 하니깐. 


이 불안과 걱정의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생각을 했다. 


불안이 훅 하고 밀려올라치면 그것을 덮어버릴만한 다른 생각으로 불안을 흐릿하게 만들어놓기로 했다. 그건 내가 꿈을 키우기 시작할 때, 새로이 피어나는 꿈 앞에서 흔들릴 때마다 썼던 방법이었다.   



내가 꿈을 갖기 시작하면서 내 꿈 때문에 마음이 무척 힘들어질 때가 있었다. 없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그것.


이미 나보다 잘나가는 사람, 자리 잡은 사람, 성공한 사람들을 볼 때면 나의 발버둥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이곤 했다. 이제 와서 이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싶고, 괜히 고생만 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의기소침해졌다.  


그럴 때면 내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마음 어디쯤에 떠 있는 반짝이는 빛을 보라고 속삭였다. 


저 희미한 반짝임이 어느 순간 선명한 별이 되어 마음 한가운데 짠, 하고 뜰 거라고.


눈부시게 반짝이는 저 하늘의 별도 별이 되기 위해 고독의 시간을 견뎌야 했을 거라고. 


건강한 경쟁심은 약간의 부러움과 합리적인 자기인정에서부터 비롯되니깐.



경쟁해야 할 대상은 선명한 너의 반짝임이 아니라 흐릿한 어제의 나일뿐이라고. 지난달 보다, 어제보다 오늘의 내가 조금이라도 선명해졌다면 된거라고. 


타인의 성공에 시기심을 느끼며 나와 비교할 그 시간에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아주 사소하고 작은 일을 찾아서 해 보자고. 


그런 다정한 일침이 내 안의 나를 단단하게 만드는데 큰 힘이 되어 주었는데, 아이를 향해 비교의 말이 솟구칠 때마다 나 스스로에게 알려주기로 했다. 



'아이 각자에겐 누구도 감히 침범할 수 없는 고유한 빛깔이 있다.' 


'자신만의 속도로 자라고 있는 중이다.'


'엄마의 비교가 얼마나 무용한지, 이미 겪어봐서 알지 않느냐'  



아이의 자라남, 그 성장의 한 걸음에 집중하기로 했다. 


아이의 고유함, 넘볼 수 없는 개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엄마의 비교, 그 무한한 무용함을 잊지 않기로 했다. 



물론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비교의 말들이 내 목구멍에 차오르는 순간이 왜 생기지 않겠느냐만, 이미 다짐한 것들이 있지 않은가. be yourself! 너 자신으로 살라고 해 놓고 돌아서서 넌 왜 그것도 못하느냐고 말하는 건 반칙 중의 반칙. 걱정되는 마음, 불안한 심정을 차분히 눌리는 것 역시 부모의 훌륭한 자질 중 하나가 아닐까.


너는 너 일 때, 나는 나 일 때 가장 빛날 수 있다는 믿음과 그로 인해 느끼는 처절한 한계에 대한 수긍, 그럼에도 나는 나로, 너는 너로 묵묵히 살아가자는 것이다. 



물론 엄마이기 때문에 가질 수밖에 없는 걱정이 묵직하게 나의 마음을 누르겠지만,  네 인생의 주인공은 언제나 너라는 마음으로 아이를 바라봐 주기로 하자. 그러기 위해선 내가 바빠지는 수밖에. 나는 내 꿈길이나 헤쳐나가야지. 내 모든 에너지중 절반을 아이가 아닌 나에게 쏟아붓는 거다. 아! 아이에게 향할 잔소리와 간섭 같은 것은 특히나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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