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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정민 May 23. 2020

육아에세이 - 너와 나를 향한 외침

                                                                                                                                                                                                                                                                                                                                                                                                                                                                                                                                                                    

내 성격이 원체 꼼꼼치 못하다. 오죽했으면 ‘대충 장 선생’이라는 별명을 스스로에게 지어줄 만큼 ‘그 정도면 됐어.’라는 말을 입에 자주 올렸다. 


물론 지금도 중요치 않은 일에 대한 결정을 할 때엔 그 말부터 나오긴 한다. 


예를 들자면 쇼핑을 할 때나, 청소를 할 때, 또는 요리를 할 때. 아이들 물건을 고를 때조차 그럭저럭 괜찮으면 고민 없이 결제를 하는데 이런 성격이 잘 고쳐지지가 않는다. 


사 놓고 나면 더 좋은 것이 눈에 들어와 후회할 때도 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만다. 


대충 좋아하고, 대충 싫어하고. 이만하면 그만할래라는 태도로 삶을 살아왔다. 


어떠한 것을 몰두하여 좋아해 본 적도, 싫어해 본 적도 없다. 오죽했으면 소녀 시절, 모두가 하얀 풍선 노란 풍선을 들고 내 가수 앞에서 소리를 지르거나, 브로마이드 혹은 토마토와 같은 잡지를 매주 사 보며 호들갑을 떨 때조차 무덤덤했다. 연예인을 좋아하는 것도 열정이 있어야 가능 한 것이라는 걸 나이가 한참이나 든 후에 깨달았다. 



'열정, 관심, 애정, 열광'이라는 단어보단 '대충, 적당히, 무미건조' 같은 단어가 나에겐 훨씬 더 잘 어울렸다. 


유년 시절엔 어떠했는지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중학생 이후의 시절은 꽤 선명하게 기억나는데, 그때도 허점 투성이였다. 하지만 허점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거나 괴로워하는 일 같은 건 그때도 거의 없었다. 좋게 말하면 유도리가 있다고 해야 하나. 피곤하지 않은 성격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놓고 나중에 ‘후회’를 몰아서 하는 인간이기도 했다. 


‘아 그때 조금 더 열심히 할걸.’ 과 같은. 아, ‘후회’의 아이콘이라고 해야 하나. 




대체로 나의 허점은 ‘적당히’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반 대표로 뽑힌 글쓰기 과제를 하면서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마음이 편안했던 기억이 난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 과제를 미루다가 결국 하루 전 날 부랴부랴 무언가를 적어서 냈다. 어쩔 수 없이 반 대표가 되었다는 반항심과 이 정도면 됐다는 마음이 합쳐진 결과물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나 외에도 한 명의 친구가 반 대표로 글을 써 오기로 했는데, 꾸깃꾸깃 접힌 a4용지에 손으로 휘갈려 쓴 글쓰기 과제와 워드로 반듯하게 작성하여 파일에 정리해 온 친구의 과제는 겉모습부터가 달랐다. 과제를 함께 제출하며 얼굴이 화끈거렸던 기억이 난다. 선생님이 나에게 그 어떤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부끄러웠다. 내 마음이 나를 향해 소리치는 것을 분명히 들었다. 


‘야! 좀 제대로 한번 해 보지. 너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하지만 그러한 감정은 이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어쩔 수 없지. 뭐’ 그러고 말았다. 


시험공부를 할 때도, 체육 대회 같은 행사에 참여할 때도, 또 평소에 친구들이랑 놀 때조차 내 삶의 온도는 뜨뜻미지근했다. 어느 것 하나에도 불같이 활활 타올랐던 적은 없다. 


하지만 뭐든 ‘적당히’ 또는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만큼은 해 왔기 때문에 큰 문제도 없었다. 




서른다섯이 된 지금, 그 ‘적당히’라는 말을 내 삶에서 지우기로 했다. 


물론 내가 가치롭게 여기는 것 앞에서 말이다. 여전히 나는 옷을 고르는 일이나 화장품 같은 것을 사는 일에 열정적이지 못하다. 아니, 안목이 없다고 해야 하나. 관심이 없다고 해야 하나. 예쁜 걸 사고 싶지만 예쁜 걸 사기 위한 시간과 정성, 그리고 돈을 들이는 건 싫으니 관심이 없는 편에 속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관심이 없으니 안목은 점점 떨어지게 마련이고. 내 물건조차 그러할진대, 아이나 남편의 물건이라고 다를까. 


가구 사이즈를 제대로 측정하지 못해 예상보다 큰 가구, 혹은 작은 가구가 들어와도 아! 감탄사 한번 날릴 뿐, 문제 삼지 않는다. 게을러서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도 인정. 



인생에서 어느 부분은 '적당' 해야만 할 때도 있다. 불완전한 인간으로 태어나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오만이고 자만일 테니깐. 그렇다고 해서 우선순위도 모른 채 모든 영역에 느슨하지 말아야지. 그 또한 인간으로 태어난 한 생명으로서 가져야 할 인간다운 맹세가 아닐까. 


삶의 모든 영역에서 미지근하게 살지 말자고 다짐했다. 적어도 스스로 중요하다 여기는 부분에서만큼은, 내 모든 걸 쏟아부어도 괜찮다고 생각이 드는 영역에서만큼은 뜨거워지자고 말이다. 


유시민 작가가 어느 방송에 나와서 그랬던가. 인생에는 정해진 의미 같은 건 없다고. 그저 사는 우리가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면 된다고. 


가치관이 없는 삶을 살았다는 것, 내 삶을 나 스스로 규정하고 책임지지 못했다는 것.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안타까움이 콸콸콸 쏟아졌다. 



인생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그 말을 몇 번이나 곱씹어 본 줄 모른다. 


되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닥치는 대로 살아왔던 지난 세월이 갑자기 허망해졌다고나 할까. 그러면서도 그 또한 내 삶의 일부였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흘러간 세월, 지나가버린 시간 앞에서 도대체 할 수 있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으니깐.


단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순간, 내가 몸담고 있는 이 시간에 대해서 만큼은 이전과는 다른 책임감을 느끼기로 했다. 필요하다면 있는 힘껏 내 몸을 이끌고 가 보자,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대충, 적당히 해도 되는 일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분별력을 가지기로 했다. 내 삶에 의미라는 것을 부여해 보기로 했다. 


내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일이 있다는 것이, 내 삶 구석구석에 관여하는 것이, 현재라는 시간 위에서 당당히 서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근사한지, 짜릿한지, 굉장한지 느끼며 살기로 했다. 



'적당히'라는 말과 닮은 말이 있다. '평범하게' 


그렇다. 난 평범하게 살고자 노력했다. 모난 돌이 정맞는 다는 말을 기억하며.


눈에 띄는 인생보단 보호색처럼 있는 듯 없는 듯한 삶이 편한 것이라고 여기면서 말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남들 사는 것만큼, 남들 사는 것처럼 살면 그게 바로 성공이다'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뛰어나지도 색다르지도 말고 보통으로 살아라.' 


너무 잘 나거나 혹은 너무 없이 살아서 괜히 몸 고생, 마음고생할 일 만들지 말고 걱정 없이 살라는 말이었을 것이다. 각박하고 쉽지 않은 세상 평안과 안정만 가득하길  간절히 바라는 부모 마음이었던 것이다. 


 모험이나 도전보단 내 눈앞에 놓인 길을 걷는 것에 집중했다. 그것이 모두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용기보단 안주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왔던 인생에서 뜨거움을 찾기란 쉽지 않은 것이 당연했을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여전히 '아무런 일 없이' 지내온 나를 기특해 하신다. 



무슨 말인지, 어떤 마음인지 왜 모를까.


부모가 되어보니 더 잘 알겠는걸.


'평탄하기만 하다면 참 좋으련만'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게 부모 마음이기도 하니깐.


그래서 '평범'을 외치며 혹시나 남다른 선택으로 괜히 상처받을 일, 고생할 일 만들지 말라고 말리고 외치고 싶기도 하니깐. 



그런데 난 나의 아이들에게 '적당히' 혹은 '평범히'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다. 


남들처럼, 남들 만큼 살라는 말로 내 아이 만의 색깔을 흐릿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청소년 시절엔 열심히 해 보라고 해도 뜨뜻미지근할 확률이 높은데, 거기에 대고 굳이 '그 정도면 돼.' '적당히 해.' '평범하게 가' 하고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공부만 하면 돼' '사내애가 뭐 그딴 일로 우냐.' '남자는 이렇게 사는 게 좋아' 와 같은 말로 아이의 호기심과 모험심에 찬물을 끼얹지 말아야지. 


대신 '넌 지금 뭐가 제일 좋은데?'라는 질문을 하고 싶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주야장천 들어왔건만.


그래서 기회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무얼 좋아하는 인간' 인지에 대해 고민해 볼 기회.


초등학생 시절, 중,고등학생 시절, 대학생 시절.. 아마 그 대답은 모두 다 달랐을 텐데. 


그 대답이 그 당시 나의 상태를 나타내 주는 말이었을지도 모를 텐데. 


나조차 내가 무얼 좋아했는지에 대해 모르고 지나왔으니, 어떻게 뜨거운 인생을 살아볼 궁리를 할 수 있었을까. 



네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따스한 지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무한한 응원. 


이리 휘청, 저리 휘청 거릴지언정 자신이 정한 길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굳은 결심이 마음이 깃든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다. 자신에 대한 존중과 인정을 스스로 할 수 있는 아이였으면 좋겠다. 


그로 인해 자신의 한계를 처절하게 느끼게 될지언정, 그 한계마저 자신의 일부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될 대로 되겠지' 와 같은 태도로 인생을 사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외면이자 무시며, 비난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깨달았으면 좋겠다. 



적당히라는 말에 파묻혀 정작 중요한 삶의 가치를 놓치고 여태 살아왔다. 


그렇게 흘러가버린 나의 인생에 대해 속죄라도 하듯 지금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내 삶을 즐기기 위해 노력 중이다. 


'즐기다.' 꼭 외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단어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즐기다'라는 말이 나의 내면과 만날 때, 


'즐긴다'라는 단어의 진짜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즐기다'라는 말이 가진 진정한 아우라를 느낄 수 있다. 


 ‘머리 좋은 자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고’고 하였던가.


즐길 수 있는 자가 진정한 승리자인 이유는 고여있지 않기 때문 아닐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며 지금 그 모습만을 소중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삶을 즐길 줄 아는 이는, 결코 머물러 있지 않다. 


제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에 관한한 지금 있는 그 모습을 넘어서려고 노력한다. 그 노력을, 자신의 끈질긴 그 한 걸음을 그들을 사랑한다. 


어제의 ‘나’보단 조금 더 나은 오늘의 ‘나’로 살길 희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간절하고, 강렬한 희망은 행동이 되어 그 어느 것보다 무겁다는 자신의 두 다리를 기꺼이 움직이게 한다.  



적당히라는 말은 사실 두려움을 숨기기 위한 방어기제였다는 생각이 든다. 


더 잘 해낼 수 없을 것 같아서, 괜히 누군가를 실망시킬까 봐서 겁이 났던 것이다. 


 '이 정도 노력이면 이만한 결과가 당연하지 뭐.' 하고 스스로를 체념시키기 좋았던 것이다. 


몽땅 털어 넣었는데 고작 이 정도라니! 하며 좌절하고 싶지 않았던 마음. 


그 정도나 해 놓고 겨우 그거니?라는 비난을 듣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함.


해도 안되면 어떻게 하지?라는 두려움 같은 것들이 내가 내뱉었던 '적당히'라는 말 안에 숨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 자신에 대한 신뢰나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스스로와의 좋은 관계 맺음이 가능했을 리가 없다. 


그러니깐 더 나은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애를 쓰기보단 지금의 내 상태를 보존하기 위해 숨기 바빴던 거다. 


안주와 멈춤, 그리고 이 정도면 적당하다는 자기암시. 



자신의 껍데기 안에서 한 걸음도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타인에 대해서도 역시 가혹하거나 깎아내리려 할 뿐이다라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서라기보단 좋은 엄마로 보이기 위해서 바동거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던 날, 내 마음의 방향이 길을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아이, 내 남편, 나의 가정을 왜 타인에게 인정받아야 하는 것인가.


하물며 나는 왜 '아내' '엄마'로의 인정은 갈구하면서 왜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해선 무감각했던 것인가.


내가 나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지 못하는데, 무슨 수로 엄마로 아내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인가.


미저리 같은 아내, 집착하는 엄마로 변하기 딱 좋겠구나 싶었다. 


내 삶을 사랑하지 않는데, 타인의 삶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인정할 수 있을까.



내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지만


그 거대한 마음에 아이도 나도 질식하지 않으려면 


아이를 사랑하는 만큼 나의 삶에도 주체적이여 하는 것이다. 


내 삶을 아이만큼이나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온전히 나를 사랑하기 위해선 결국 엄마도, 아내도 아닌 나로, 나 자신으로 우뚝 서야 하는 것이다. 


적당히 주어진 일만 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미처 발견하지 못하는 삶에 대한 주체성. 



삶에 뜻과 꿈을 품고 주체적으로 살야겠다는 다짐을 한 후 신기하게도 아이로, 남편으로 나를 인정받아야겠다는 생각이 사그라들었다. 


어느 엄마보다 잘난 엄마로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냥 '나'로 살기로 한 것이다. 주체가 단단하면 부수적인 역할은 알아서 따라올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 


내 삶에 주체적일 수 있었던 가장 큰 계기가 바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찾았던 그 순간 부터였던 것 같다. 



그래서 아이에게 꼭 이야기해 주고 싶다. 


'네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꼭 찾아보라고.'


'그 일을 하면서 지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해 보라고.'


'자신과 타인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일이라면 엄마는 언제나 응원하겠노라고.'



예상치 못한 대답을 할 걸 대비해서 그동안 마음을 많이 단련시켜 놔야겠다. 


'아, 야! 진짜 이럴래?' 하고 소리 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낄만한 핵폭탄 급 제안을 한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할까. 


자식이 내 맘처럼 되지 않는다는 걸 매년, 매달 느끼고 있어서 그런지 


모든 걸 응원해 주겠노라 다짐하는 이 순간에도 마음 한 켠, 불안함이 솟구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럼에도 '야, 남들처럼 평범하게 해라!' '적당히 하고 말지 뭘 그러냐' 라는 말로 아이만의 색깔과 향기를 빼앗지 말아야지. 널 그대로 인정해 주겠다는 말을 해 주어야지. 그래야 아이 역시 '나'로 사는 삶에 대한 희열을 느끼지 않겠는가.  



자, 오늘도 다짐하자.  


어차피 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게 자식이라고 하니 이왕 그렇게 된 거 OK! Be yourself! 하고 어깨 한번 으쓱해 주는 거다. 멋지게.


그리고 나 역시 나 자신으로 늙어.. 아니 살아가는 거다. 평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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