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정민 May 17. 2020

엄마에게 궁금함의 정량이란


"얘, 누구야?"
"잉체(린체/아이반 여자아이 이름)"

두 눈이 번쩍 띄였다. 고작 이게 뭐라고 아이의 대답에 남편과 함께 축배를 들 뻔하다니. 어린이집에서 보내 준 사진 속 같은 반 친구의 이름을 기대하나 없이 물었는데, 흐릿한 발음으로 입을 오밀조밀 움직여가며 대답하는 것 아닌가.
딸 가진 엄마들은 이 심정을 모른다. 아무리 물어도 대답 한번 없는 시니컬한 남자아이 둘을 키우는 애미의 마음을.
자동차를 가지고 놀 때엔 그렇게 조잘조잘 시끄럽더니, 필요한걸 요구할땐 또박또박 잘도 말하더니, 어린이집에 다녀온 일을 묻는 엄마의 질문엔 묵묵부답일 때가 많다. 아니 거의 다라고 해도 좋겠다. 무엇을 하며 재미있게 놀았냐는 질문에 기껏 하는 대답이 "맘마, 우유, 고구마" 다. 하긴 그 대답도 처음 들었을 땐 감격스러웠다. 먹은 걸 이야기해 주는 게 어디냐 그러면서.
그런데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내가 무슨 질문을 하든 대답은 한결같았다. 성의라곤 반 푼어치도 없는 것들이라고.
그러면서도 어제도, 오늘도 "오늘은 어린이집에서 재미있게 놀았어? 뭐 하고 놀았어?"라는 하나 마나 한 질문을 하게 되는데, 아무래도 엄마의 불순한 의도를 눈치챈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이를테면 기억력 테스트, 교우관계 스캔과 같은것) 아이는 내 질문에 제대로 된 대꾸 한 번 하지 않는다.

요즘엔 손으로 쓰는 알림장 대신 키즈노트라는 앱이 있어 아이의 원생활을 선생님이 사진으로 매일같이 올려준다. 활동사진 위주로 아이의 모습이 찍혀 있는데 그 사진만 봐도 그날 하루의 생활이 짐작 가능하다. 하지만 나는 궁금한 것이다.
이 녀석이 오늘 하루를 즐겁게 보냈는지, 혹시 속상한 일은 없었는지, 때때로 오늘 있었던 일을 누군가에게 전달할 만큼의 기억력은 갖고 있는지 따위가 말이다. "좋았어."라든지 "싫었어." 같은 말이라도 좋으니 아이의 입을 통해 듣고 싶은 것이다. 당최 내 질문에 대답이라곤 하지 않을 때면 질문 자체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는데 그럴필요 없다는걸 잘 알면서도 그렇게 시작된 걱정이 쓸모없이 내 마음과 머릿속을 어지럽히곤 한다.

유치원 교사였을 때 담임인 나를 찾아와 하소연하던 엄마들이 불현듯 떠올랐다.
"도대체 유치원 생활에 대해선 입도 벙긋하질 않아요! 궁금해 죽겠는데 말을 안 하니 알 수가 있어야 말이죠."
"내가 이래서 일부러 여자아이 엄마랑 친해지려고 한다니깐요. 쟤가 말을 안 하니깐 같은 반 여자아이한테라도 물어보려고 말이에요."
그럴 때면 "남자 애들 엄마들이 주로 그런 말을 많이 하고 가시더라고요."라는 대답을 하며 다른 엄마도 다 그러니 괜히 염려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넌지시 해 주곤 했다. 애를 붙잡고 '집에 가서 제발 말 좀 많이 해 줘, 엄마한테!'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아이가 '네! 내일부턴 엄마에게 꼭 다 말할게요.' 하지도 않을 터. 어쩔 수 없지 않을까 그러고 말았는데 딱 지금 내가 어린이집 선생님을 붙잡고 하소연을 하고 싶은 심정이 된 것이다.

가끔 놀러 오는 동네 동생이 우리아이들 보다 한살 어린 자신의 딸을 째려보며 "쟤 진짜 말 많아요. 어린이집 갔다 오면 하루 종일 떠들어요."라고 하며 귀찮아할 때가 있는데 얼마나 부럽던지. 애가 둘 이면 하나는 조잘조잘 잘도 떠든다던데, 도무지 해당사항이 없는 것 같아 혼자 한숨이나 푹하고 쉬고 만다.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지 뭐. 말하기 싫음 말아라!' 하고 돌아서지만, 아이가 '엄마! 있잖아요~'라고 나를 불러 세워주길 여전히 내심 바라고 있다.

도무지 말로 물어봐서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을 것 같아 비장의 카드로 '키즈노트'의 사진을 꺼내들었다.
"얜 누구야?" 하고 묻기 위해서.
말로만 물으면 내 얼굴 한 번 쓱 쳐다보고선 제 갈 길을 갔을 게 뻔하니깐. 일단 폰이라면 호의적인 아이들이기에 폰 속 사진을 꺼내든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무슨 사진인가 싶어 쪼르르 내 옆에 앉은 아이는 "잉체" "때유리" "은또" 하고 내가 묻는 대로 대답을 해 주었다.
그때 내 귀에만 들리던 팡파레 소리를 잊지 못한다.
'이게 어린이집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그냥 있다가 오는 건 아니구나!' 그러면서 말이다.
혹시나 더 이야기 나눌수 있지 않을까 싶어 잽싸게 질문을 추가했건만 아이의 대답은 딱 거기까지었다.

그런 나의 심정을 고스란히 옮겨 논 것 같은, 꼭 내 마음을 닮은듯한 시 하나가 번뜩 떠올랐다.
'궁금함의 정량'이라는 시집 속에 실린 '천천히 먹어,라는 말'이라는 제목의 시다.
모처럼 일찍 귀가한 네가 무지 반가워 나도 모르게 '천천히 먹어'라고 말하게 된다는 시인의 글. 그건 아마 더 오래 함께 있고 싶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혼자 먹었던 슴슴한 두부 부침이 너에겐 더 구수하길 바라는 그 마음은 나 혼자 끼니를 때울땐 고픈 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상을 차려 후루룩 먹고선 치우기 바빴지만 너는 천천히 꼭꼭 씹으며 음식의 참 맛을 고스란히 느끼길 바라는 마음이겠지. 덩달아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조금 더 길어지니 일석이조가 따로없는 것이다.
'생선 가시 하나하나 발라주며 낮에 있었던 일을 살짝 염탐해 보려는 말' 역시 '천천히 먹어'라는 말속에 내밀하게 숨어 있기도 하고, 허겁지겁 밥을 먹는 네 옆에서 그 모습을 오래오래 보고 싶다는 말이기도 하다.
'네가 밥 한 숟갈 먹는 동안 나는 고팠던 너를 두 숟갈 떠먹겠다는 말.'
천천히 먹으라는 그 말속엔 도무지 정량이라곤 없는 자식을 향한 어미의 궁금함, 끝없는 사랑이 흘러넘치는 것이다.

밥 한 그릇 다 먹으면 잽싸게 제 방으로 훌쩍 들어가 버릴 녀석이 못내 아쉬워 '천천히 먹어'라고 말하며 같이 있는 시간을 조금이나마 늘려보려는 시인의 마음과 쌩하니 제 갈 길을 가려는 아이를 붙잡기 위해 '이 사진 좀 봐!' 하고 조급하게 폰을 내밀었던 내 마음이 같게 느껴졌던 것이다.
어미의 사랑이란 이토록 짝사랑에 불과한 것.

'나도 네가 무엇을 하는지 하나도 궁금해하지 않을거야!'라고 말하며 돌아선 숱한 순간 속에서도 끝내 궁금해지고 만다. 아무리 내 안의 궁금함을 퍼내고 퍼내도 자식을 향한 어미의 궁금증은 닳아 없어질 것 같지 않은데 그게 벌써부터 여러모로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것 같다.

앞으로도 어미의 궁금증 따위엔 무신경할 것 같은 두 아들 때문에 애가 닳아 마음이 타고, 모른척해야겠다는 다짐을 수십 번, 수백 번 하면서도 끝내는 자식을 향해 고개를 쭉 빼고 귀를 쫑긋 세우고 있을 것 같은, 아무도 반가워해 주지 않을 나의 궁금증이 끝내 간섭이 되는 건 아닐까 싶어 괜스레 걱정되는 것이다.

결혼을 하기 전, 어떻게든 나와 만난 남자들과의 관계에서 이겨먹고 싶은 나머지 모른 척, 아닌 척, 안 그런척하면서도 내 온몸의 촉수를 세우곤 했는데 그 짓을 애를 낳고 나서 다시 하게 될 줄이야.
그땐 나의 척들이 꽤 쓸모 있었는데, 이젠 그것마저 영 통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자식을 향한 궁금함의 정량은 무한대일 것 같지만, 겉으로나마 아닌 척하는 고고함을 유지해야지.
너무 매달리면 질리게 마련이라는 걸 이미 해 봐서 잘 아니깐. 그렇다고 너무 관심 없는 척하면 그것대로 불만과 불평을 가득 살 텐데...
만약 이것이 연애였다면, 난 진작 포기해버렸을지도 모른다. 나 좋다고 쫓아다니는 놈이나 만날란다 그러면서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낳아보면 알게 되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