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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정민 May 10. 2020

낳아보면 알게 되는 것

'같은 처지가 돼 보아야 상대방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라는 말의 속 뜻을 완전히 깨달은 것은 아이를 출산하고 난 뒤다. 상대가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할지라도 그의 상황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힘이 든 데, 관계가 가깝다는 이유로, 또는 그와 비슷한 상황을 목격해 보았다는 핑계로 상대의 고통, 고민, 처지에 대해 아는 척하게 된다.
상대방과 똑같은 상황에 놓인 후에야 그 사람을 이해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게다가 똑같은 상황을 겪어보았다고 해서 상대의 마음과 고민을 다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내가 겪어보지 못한 일은 절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고 상대를 대해야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무리 이해하려 노력해도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땐 그 어떤 말보다 침묵이 나을 수도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괜한 조언이랍시고, 상대를 위한답시고 하는 말이 때론 독이 되기도 하니깐.

결혼 전 유치원교사로 일을 했다. 많은 학부모를 만났고 많은 아이들과 생활했다. 그래서 나는 육아를 해 보았다고 착각하고 만 것이다. 엄마가 된 친구가 겪는 고민을 들을 때면 답답해져 한마디식 하곤 했는데 '애가 없으면 잘 몰라'라는 친구의 말에 발끈했던 기억이 난다. 그땐 '모르긴 왜 몰라. 내가 얼마나 많이 지켜봤는데!'라는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이다.
출산은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편협한 시선으로 타인을 바라보고, 평가하고, 비난했었는지 정통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다시 말하면 나 때문에 상처를 받았겠구나 이제서야 느낀 것이다.
엄마는 강하다고 하지만 그건 아이를 향할 때나 통하는 말이지, 타인과 세상의 반응과 태도에 나도 모르게 촉수를 세우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지켜내려는 어미의 본능으로 천하무적이 되기는 하지만 그 귀한 것을 제대로 지켜내고 있는 것일까 스스로에 대한 의심과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일에 대한 두려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것을 지켜내야 한다는 책임감과 그 책임감에 따르는 불안감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촉수가 곤두서는 것이다.
그건 다시 말해 상대방의 사사로운 말과, 행동에 큰 타격을 입게 되기도는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전에 없던 고된 육체노동과 끊임없이 휘청대는 영혼의 흔들림 속에서 새 생명을 이 악물고 지켜내기 위해 발악하게 되는데 딱 그만큼 그동안 나를 지켜왔던 자존감이 소진되는 기분이다. 잘하려고 할수록 맘처럼 되지 않는 육아 앞에서 털썩 주저앉게 된다. 게다가 나 빼곤 전부 육아 고수들 뿐인 것만 같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엄마로서의 부족함이 쉽사리 채워지지 않는 그 참을 수 없는 기분.
그래서일까, 괜한 말에 섭섭해지고 작은 행동에 눈물이 난다.
잘 하고 있다는 말 한마디가 때로는 존재에 대한 인정 이자, 무한한 용기로 다가갈 수 있다는 걸 이제서야, 내가 경험하고 나서야 깨달은 것이다.
직접 겪어보지 않아도 눈치껏 알아채는 인간이었다면 좋았을걸.
위로랍시고, 조언이랍시고 하는 말 안에 뾰족하고 날카로운 화살이 숨어 있을 수도 있다는 걸 미리 알아챘으면 좋았을걸.
누군가에게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받을 때면 지난날 내가 던진 화살들이 생각나 더욱 아파지는데 가끔은 그게 쌤통이라고 생각될 때가 있다.

돌아서면 어질러져 있는, 치우는 속도보다 어지럽혀지는 속도가 더 빨라 아이가 깨어있을 땐 도무지 정리가 되지 않는 집구석에 두 손 두발 다 들었던 날, '어질러봐라. 내가 안달하나! 맘대로 해' 하고 통보했던 날, 아! 하고 떠오른 일이 있었다.
먼저 아이를 키우던 친구의 집에 놀러 갈 때면 구석구석 어지럽혀진 장난감을 하나 둘, 내 멋대로 정리하곤 했다.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도 돌돌이로 치우고 먼지도 물티슈로 훔쳐냈다.
아, 재수 없어라.
그냥 '애 키우는 집 다 똑같더라' 그러면서 애나 한 번 더 안아줄걸. 내가 있는 그 시간만큼은 아이가 엄마에게 가지 않을 수 있도록 어화둥둥 업어주고, 안아주며 재미있게 놀아나 줄걸.
친구가 왔다고 뭐라도 내놓으려고 할거 뻔히 아니깐, 바로 먹고 모조리 쓰레기통에 집어넣을 수 있는 간편한 음식 몇 가지 사 가서 한 끼 편안하게 때울 수 있도록 해 줄걸. 야박한 시누이처럼 먼지 검사하는 것 마냥 방이나 훔쳐대고 있었으니 마음 한구석이 얼마나 불편했을까. 청소도 하지 않는 게으른 엄마가 된 기분을 느끼지 않았을까.
실제론 금방 청소한 방인데 말이다. '금방 내가 치웠어!'라는 친구의 말을 들으며 '치웠는데 왜 더러워'라고 생각했으니 애 없는 친구는 애 가진 친구에게 이렇게나 무용할 뿐이다.

키워보지 않아놓고 훈수 질은 또 얼마나 잘 했던지. 가만히 들어주면 안 되냐는 친구의 말이 이제서야 무슨 뜻인지 완전히 알겠다. 어린이집에 보내는 일로 고민하던 친구에게 애를 위한답시고 했던 전직 유치원교사의 지적과 훈수가 얼마나 부질없고 쓸모없었는지. 참으로 눈치도 없었다 싶어 괜히 뜨끔해진다.
그렇게 하면 선생님이 싫어할걸?이라고 외쳐대면서 정작 이렇게 행동하면 친구가 나를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참으로 답답한 인간이 나였다. 그때의 난 그 말이 진정으로 친구에게 도움이 되는 줄로만 알았다.

모든 스케줄이 아이를 향해 있고, 본인보다 아이의 물건, 아이의 음식, 아이의 기분과 상태에 초점을 맞춘 채 살아가는 그녀들을 바라보며 오래 알고 지낸 사이지만 참으로 낯설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을 했는데 그것이 얼마나 건방지고 무지한 생각이었는지.
시판 이유식과 분유를 앞에 두고 마음 아파하는 친구를 멀뚱히 바라보며 도대체 어느 포인트가 슬픈 것일까 너무 감상적인 것 같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는데, 생활비가 많이 든다며 불평하면서도 제일 좋은 것을 아이에게 내놓는 친구에게 그럴 필요까지 있느냐고 핀잔했는데 그게 엄마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엄마이기 때문에 느끼는 절절한 그 마음을 엄마가 아닌 나는 온전히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알 수 없는 마음 한구석으로 그녀의 감정과 심경에 피곤함을 느끼곤 했다.
직접 육아를 하고 난 뒤에야 그때 그 말이, 그 고민과 슬픔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 괜히 마음이 쿡쿡 아리곤 하는데, 그때 친구에게 준 상처에 대한 벌인지도 모른다.

엄마가 되고 난 후에야 엄마의 마음을 알 것 같다는 말을 많이들 한다. 해 보기 전엔 엄마의 행동이 궁상과 청승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이해되고 안타깝고, 고맙기도 한 것을 보니 똑같이 해보아야 안다는 말에 공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너 같은 거 낳아서 키워라 꼭!' 무심한 딸을 향한 엄마의 외침이 문득문득 생각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결혼을 하지 않은 여동생이 가끔 나에게 떠는 시건방에 콧방귀를 흥하고 뀌곤 못 들은 척 하는데 저도 해 보면 다르다는걸, 말같이 되는 게 육아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악마같이 웃는다.
"빨리 결혼해서 애 낳아봐~ 너무너무 좋아." 그러면서 말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너도 나에게 미안해할 날이 올 것이야! 이것아.

아이를 낳으면 뭐가 좋냐고 묻는 이들이 종종 있다. 아이가 없는 부부 또는 싱글의 질문이다.
이리 재고 저리 재도 자식을 키우는 일은 마치 흑자 없는 사업 같아 보이는데,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 제 손으로 무엇이든 척척해 낼 수 있을 때 까진 부모의 시간, 정성, 돈, 마음.. 뭐 하나 내놓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식이 큰다고 해서 부모라는 역할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도 아닐 터. 얻는 것이 있다면 예전보다 웃을 일이 많아졌다는 것쯤인 것 같은데 그거 하나 얻자고 모든 것을 포기해도 좋으냐는 뜻일 것이다.

무슨 말인지 왜 모를까. 낳아보니 더 잘 알겠는데. 얽매일 곳 없는 딩크족 또는 싱글들의 그 눈부신 자유로움.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등 뒤에 커다랗고 하얀 날개. 어디든 언제든 훨훨 날아갈 수 있는 그들.
당분간은 날 수 없음!이라고 써 붙여진 내 등 뒤를 볼 때면 시큰시큰 마음이 쓰라리곤 한걸.
날개 대신 애 둘을 등에 업고 두 다리로 부지런히 하루를 살아내는 내가 가끔은 안타깝기도 하니깐.
그래서 '너도 어디 한번 낳아봐라!' 하는 비열한 미소를 보낼 때도 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 더 많은 순간 엄마로 사는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나의 성장에 아이보다 더 좋은 자극제를 만나본 일이 전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주기만 해야 된다는 것은 낳아보지 않은 자의 오해인 것이다. 우린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라 함께 자라나고, 성장하는 동지라는 말을 해 주면 이해할 수 있으려나?

대학까지 나와서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삶의 중요한 지혜들을 나는 아이를 낳고 난 후 배울 수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더 나은 삶에 대한 갈망이었고, 또 성찰의 시간이었다.
그 성찰의 시간 덕분에 그동안 내가 얼마나 건방지고 무지한 인간이었는지 알게 된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성장할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너른 마음과 따스한 시선으로 타인과 세상을 바라보며 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이에게 고마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기만 한 생명의 탄생을 직접 겪었다. 나만큼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존재가 세상에 있을 수 있다는 걸 경험했는데 그게 내 삶을 전과 다르게 만드는 힘이 되어주었다.
그토록 소중한 내 아이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부모라고 생각하니 도저히 멋대로 살아갈 수 없다. 아이를 잘 키워내고 싶은 마음만큼 내 삶을 잘 살아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 다짐의 결과 중 하나로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지 않은가.
아이의 미래가 궁금한 만큼 아이와 함께 성장하고 있는 나의 미래도 참으로 궁금해 지곤 하는데, 그건 그동안의 나보다 앞으로 변화할 나에 대한 기대와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이 조그마한 것도 매일 자라려고 아등바등 노력하는데, 이 엄마가 가만히 있을 순 없지!'
'너도, 나도 잘 살아내 보자.' '얼른 커서 누가 더 멋지게 살아가는지 대결해보자!'
젖과 함께 내 자존감을 쫍쫍 빨아먹던 이 아이가 어느새 자라 나의 원동력이 되어주고 있으니, 밑지는 장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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