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태도를 익히는 중입니다>
툭하면 끊어질 것 같은 낡고 썩은 부부의 연을 과감하게 끊어내지 못한 건 자식 때문이라고 말하며 사는 엄마, 아빠 밑에서 그래도 좋은 날도 있지 않았는가 라는 주문을 외며 동생과 나는 살아왔다.
십 대 후반부터는 특별하게 불행(지독한 가난, 폭행.. 과 같은) 하지 않았지만 다정하고 따뜻하다는 느낌보단 ‘그래도 가족이니깐’이라는 마음으로 많은 날은 지냈던 것 같다.
부부로서의 합은 좋지 않은 편이었지만 두 분 다 자식을 아끼는 마음은 컸었는데, 그 마음을 우리 자매도 느끼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버틸 수 있었던 시기도 분명히 있었고.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러면서도 부모를 향한 애틋함을 느꼈는데, 우리의 삶을 고단하게 만든 건 어쨌든 돈 때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깐 우린, 실은 굉장히 행복할 수 있는 가족이었지만 그놈의 돈 때문에 조금씩 어긋나게 된 것이라고.
돈 때문에 싸우고 있는 부모를 볼 때면 숨이 턱턱 막히곤 했는데, 마음에 상처 말곤 남는 건 그 싸움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다른 방법은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많이 닳아버린 두 사람을 보는 것은 자식으로서 힘든 일이었다.
어쨌든 우리의 존재가 상처 받은 부모에겐 위로가 될 거라고 생각했고, 그건 실제로도 그랬다.
무얼 하든 엄마, 아빠의 입장부터 고려하게 된 건, 분위기와 눈치를 살피게 된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싸움을 말리든, 같이 싸우든 뭐든 해야 직성이 풀리는 나와는 다르게 동생은 ‘나는 지금 도를 닦는 중이오’ 같은 태도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곤 했다.
언제나 중간에서 애달픈 건 내 문제였는데, 그런 나를 보며 얄밉게 한 마디씩 하곤 했다.
“언니도 신경 끄고 언니 할 일이나 해라. 괜히 쓸데없이 나서지 말고.”
그리고 제 밥벌이를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동생은 담담하게, 하지만 당연한 일이라는 듯 우리 가족을 향해 선포했다.
“나 독립할 거야.”
우리 모두는 놀랐는데, 이유는 제각각이었다.
우선 부모님은 딸의 안전 문제와 더불어 굳이 쓰지 않아도 될 돈을 결혼 전에 쓸 이유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고 나는 결혼을 하게 되면 나 가살 게 뻔한데 굳이 미리서부터 나갈 필요가 있느냐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실은 나 대신 부모님 곁에 남아주길 바라는 이기심이 있었다. 게다가 나는 절대 할 수 없었을 결심을 한, 자신의 삶을 더욱 신나게 살아보겠다는 동생에 대한 알 수 없는 섭섭함 같은 것이 조금 생기기도 했고.
동생보다 먼저 결혼을 하면서 집을 먼저 나온 건 나였는데 싸우는 꼴을 보지 않아서 좋다고 생각하는 한 편, 내가 중간에서 이리저리 잘 달래주어야 할 텐데 싶은 걱정도 들었던 것. 하지만 이내, 새로운 내 생활에 젖어들었고 가끔 들리는 친정집은 겉보기엔 평화롭고 고요해 보였기 때문에 잘 지내겠거니, 모르는 척하며 지낼 수 있었다.
게다가 동생이 있으니깐. 어쨌든 안심이 되었다고나 할까.
이제는 내가 하던 그 모든 역할을 네가 떠안아야 한다고 은연중에 생각했던 걸까.
가족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서로가 서로 때문에 힘든 것쯤은 아무렇지 않게 견뎌내야 한다고, 그게 가족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 같다.
합심해서 엄마와 나는 동생의 독립을 막았다.
처음엔 나에게 SOS 하는 동생이 안쓰러워 보여 엄마를 설득해보려고도 했지만 너무나 완강한 엄마의 태도를 보고선 마음을 바꾸었다.
그래, 아직 엄마에겐 동생이 필요하지 아무렴! 그러면서. 혼자 살 동생이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기도 했고.
나중에 동생은 이때까지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단호함과 냉정함으로 나를 향해 서운함을 쏟아냈다.
“지는 나가서 잘만 살면서 왜 나한텐 이러는 거야? 지금부터 언니는 내 일에서 빠져. 신경 쓰지 마”
나도 나가고 없는데, 동생까지 없으면 엄마 아빠는 어떻게 지낼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컸다. 자주 다투긴 했지만 나와 내 동생에겐 더없이 큰 버팀목이기도 하니깐.
부모님이 우리를 위한 삶을 살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으니깐. 어쨌든 가족이니깐 얽히고설켜서 사는 건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러니깐 아직은 좀 더 집에 남아 있으라고!
그런 우리 세 모녀를 보며 남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남편은 동생의 편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남편이라도 있어서 동생에겐 얼마나 다행이었을까 싶어 져 고마워진다.
8.15일. 71주년 광복절을 기념하는 행사가 울려 퍼지던 그날, 내 동생은 다른 의미로의 독립을 이루었다. 딱 1년만 나가 살겠다는 마지막 합의점에 수긍한 채.
그리고 지금까지 ㄹ동생은 자신의 독립에 만족하며 부모님과 옆동네에 살지만 집에는 들어오지 않고 있다.
하지만 나보다 더 자주, 더 살뜰히 엄마와 아빠를 챙긴다.
여전히 가끔 엄마, 아빠는 싸우지만 ‘어쩔 수 없는 그들의 일’이라고 선을 긋는다. 대신 엄마와 함께 마사지도 받으러 다니고, 아빠가 필요하다고 하는 물건을 대신 사 주기도 한다. 용돈도 나보다 더 팍팍 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엄마, 아빠도 가지 않은 해외여행을 내가 어떻게 가겠는가 싶어서, 이다음에 다 같이 갈 수 있을 때 가야지! 생각했던 나와는 다르게 금요일 저녁부터, 토 일. 회사를 쉬는 날이면 가까운 나라에 곧잘 떠났다가 돌아오곤 했던 동생은 더 할나위 없는 기쁨과 재충전한 에너지를 우리에게 내비쳤는데 잘 살고 있는 것 같아 보여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여기저기서 사 오는 선물이 한 몫하긴 했지만.
엄마 아빠, 나, 동생은 각자 다른 집에서 살지만 예전보다 훨씬 편안하고, 너그럽게 서로의 삶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가끔 만나 다 같이 여행도 가고, 맛있는 밥도 사 먹는다.
어쨌든 서로에게 건강과 평안 같은 것만을 바라게 되었는데, 그건 우리 사이에 생긴 적당한 거리 덕택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님은 여전히 투닥거리시는 것 같지만 둘 밖에 없는 집에서 온기도, 기운도, 기척도 서로에게서만 느낄 수 있다는 걸 어쨌든 인정한 것 같다.
“가족과는 적당한 거리를 지키기 위해 조심하고 있어. 안 그러면 구분이 없어져서 어른으로서 내 시간을 가질 수 없으니까. 그래서 일부러 혼자 살고, 혼자서 여행도 하고 그러는 거야”
좋아하는 소설을 읽다가 만난 이 대목에서 나는 한참을 멍해져 버렸다.
적당한 거리라는 것이 결국은 서로를 지켜주는 아름다운 균형을 말하는 것이겠지.
그리고 어른으로서의 내 시간을 미처 가지지 못한 채 벗어난다는 기분으로 결혼을 했는데, 부모의 세계를 떠받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지난날의 나에게 조금 미안해지더라고. 그완 반대로 제 삶을 잘 구축한 동생이 기특해지기도 했고.
스물아홉, 스물다섯, 스물. 세 자매를 독립시키고선 우리 마을로 이사를 온 이모, 삼촌이 있다.
자녀의 교육 문제나 결혼 따위로 자녀를 독립시킨 것이 아니라 순전히 네 삶은 네가 살고 내 삶은 내가 살아가자는 의미로의 독립이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딸들이 찾아오는데, 그 잠깐의 시간 동안 그들은 깊고 진한 사랑을 나누고선 제 삶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래 봤자 하룻밤 같이 자고, 밥 몇 끼 함께 먹는 것이 다인데, 그거면 충분하다고 했다.
“처음엔 빈 둥지 증후군 같은 게 있었지. 내도록 끼고 있다가 보내니깐 허전해 죽겠더라고. 그런데 우리한테도 애들한테도 훨씬 좋은 길은 각자 서로의 삶을 살아가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지금 애들한테서 벗어나서 이곳에서 언니, 동생들 사귀면서 사는 게 너무 좋다. 그리고 애들을 보내고 나니깐 우리 두 부부만 남았다는 생각이 그때부터 들더라고. 예전보다 훨씬 사이가 좋아졌어. 두 번째 신혼같이. 애들이 엄마, 아빠는 이제 자기들 신경 쓰지 말고 우리 삶을 잘 살라고 말하는데 처음엔 그 말이 섭섭하긴 했지만 그게 맞는 말이었다 싶어 지더라. 게다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잘 살고 있더라고. 제 삶에 책임지면서.”
‘어른으로서의 내 시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는 걸, 어른이 된 지 한참이나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자신만의 시간을, 생활을, 삶을 갖는 것이 가족 입장에선 이기적이라고만 여겨졌는데, 꼭 그지만도 않은 것이었다.
우린 단단하게 엮인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이지만 실은 제 각기 다른 형태와 모습으로 분리된 존재였던 것.
부모의 인생문제를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할 수 없었던 건 그건 그들의 삶이었기 때문이었고, 부모의 충분한 사랑을 기반으로 삼아 내 삶은 내가 가꿔나가야만 한다.
물론 부모에게 자식은 언제까지나 자식으로 남아 어디에서 무얼 하든 마음 한편에 툭 하고 걸리고 만다는 걸 아이를 낳고 나서 분명히 알게 되긴 했지만, 부모의 마음은 부모가 처리해야 할 몫인 것이다.
가장 친근한 타인이 가족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가족과 타인.
이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 속에서 나는 ‘적당한 거리’를 발견했다.
피와 살과 삶을 나눈 세상에서 가장 친근한 사이. 하지만 분명히 지켜주어야 할 서로의 세계가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 사이이기도 하다.
그렇게 구축한 각자의 세계가 때때로, 서로를 도와주기도, 위로해 주기도, 껴안아 주기도 할 때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더욱 건강해지고, 단단해진다. 그 울타리 안에서 우리는 편안하고, 다정하게. 그리고 안정감을 느끼며 나풀나풀 살아가겠지. 자유로움과 소속감을 균형감 있게 느끼면서.
자연스럽고 근사한 모습으로 각자의 삶을 분리하진 못 했지만, 그래서 실은 분리의 순간이 너절너절해져 버려 한동안 서로가 상처 난 제 마음을 추스르느라 이기적인 상태로 보내야 했던 시절도 있긴 했지만
이제는 각자의 세계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있다.
그 존중의 마음 사이로 새로운 사랑, 그러니깐 언제든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도록 내 삶을 잘 꾸려나가겠다는 마음이 샘 솟아나는데, 우리가 조금씩 근사해지고 있는 것 같아 기쁘다.
지금은 상상도 잘 되지 않지만 네 살밖에 되지 않은 두 녀석이 엄마, 아빠의 세계에서 당당하게 분리되어 제 삶을, 저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갈 때가 오겠지.
“엄마, 우리는 걱정 말고 엄마 인생이나 잘 살면 좋겠어요!”라고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보시오, 내 세계에서 그만 방좀 빼줄래?”라고 말해야겠다고 남편을 향해 다짐을 했다.
남편은 그런 내게 ‘제발 처제한테 했던 것처럼, 구질구질하게 그럴 생각은 하지 마라’ 고 벌써부터 으름장을 놓는데, 이보슈, 나 예전과는 좀 달라졌다고! 두고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