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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정민 Oct 09. 2020

좋은 부모에 대한 고민.

<엄마의 태도를 익히는 중입니다. #4>

달님, 좋은 엄마가 되도록 노력할게요.



"이것만 하고 잘 거예요."

밤 10시. 외출을 하고 늦게 귀가한 바람에 대충 얼굴, 손, 발만 씻기고선 서둘러 재우려 했던 참이었다. 

"어서 자자. 너무 늦었어." 나의 말에 대뜸 아이가 대답한다. 35개월 차 아기에게 들을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시크한 말투와 귀찮다는 듯한 태도로 툭 던지는 대답.

블록놀이를 절대 멈추지 않을 거라는 결의에 찬 몸짓. 내가 이만큼 자랐는데, 이 정도는 스스로 결정할 수도 있지 않느냐듯.

언제부턴가 하고 싶은 일, 원하는 것에 대해 확실하게 표현하더니.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돌진하는 아이를 보며 놀라워하기보단 '자라고 있는 중이군' 싶어 기특해지곤 했는데, 이런 식의 대답을 벌써 듣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잠을 자기 위해 뒷정리를 하던 남편과 나는 아이의 대답을 듣고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이가 없네?' 

'싫어' '안 해!'라는 대답이 나왔다면 '또 저러는군.'하고 말았을 것이다. '싫긴 뭐가 싫어. 지금은 달님이 떴다고!'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만 하고'라는 조건을 붙이고 '잘 거예요'라며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해서 나에게 통보하는 아이의 대답은 여태껏 한 번도 듣지 못한 종류의 말이었다. 막무가내로 쓰는 떼가 아닌, 이 정도는 알아서 할 수 있다는 듯,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차갑기까지 한 아이의 말투. 

도저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단순히 귀엽다든지, 재미있다든지, 어이가 없다든지 하는 등으로 우리의 웃음을 정의할 순 없을 것 같다. 여러 가지 감정이 기막히게 섞인, 오묘한 헛웃음이라고 해야 될까나.     



아이가 자랐다는 것을 시시때때로 느낀다.

작년에 산 옷이 턱없이 작아졌을 때. 

겨우 몇 달 전까지는 먹지 않았던 음식, 예를 들자면 삼겹살 같은 것에 흥분할 때. 

'나중에 또 봐요'라고 인사하며 씩씩하게 어린이집 차를 탈 때. 

'나도 이거 필요해요'라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로 명확하게 표현할 때. 

'엄마는 왜 안 먹어요?'라고 물으며 먹던 음식을 기꺼이 엄마에 내밀어 줄 때. 

그 외에도 부모가 되니 '많이 큰 것 같아'라는 말을 습관처럼, 하지만 진심을 다해 하게 되는데, 그것은 아무것도 자발적으로 하지 못했던 그때 그 시절의 모습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몇 달 만에 혹은 몇 년 만에 만난 친구의 아이를 보며 "우와 진짜 많이 컸네!"하고 외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그것은 아이의 덩치, 키, 아기 태가 없어진 얼굴같이 외적인 모습의 변화에 대한 감탄, 딱 거기까지다. 그저 세월이 흐르긴 흘렀나 보구나, 남의 아이가 자란 것을 보며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세월의 흐름을 직관하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내 아이의 자라남은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감탄인데 환희, 희열, 감동, 흥분.. 과 같은 단어들의 총집합으로도 아이의 자라남에 대한 부모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할 것만 같다. 그 벅찬 감동을 말로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아이의 모든 성장은 부모에게 실로 대단한 무언가이긴 하지만, 가끔은 성장의 모습에, 미처 예상치 못했던 성장 과정에 어이가 없어질 때도 있다.      



아이가 자랄수록 부모는 놀랄 일이 많을 거라는 걸 예상하고 있다. 나 역시 그 과정을 다 겪지 않았던가. 나의 성장에 목덜미를 잡고 얼굴이 붉어지는 엄마를 몇 번이나 보아왔던가. 성장=감동은 아기 시절에나 먹히는 말인 것이다. 클수록 더 힘들다는 말을 어디 한두 번 들었던가. 몸이 힘든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정신이 고달프다는 하소연을 이미 곳곳에서 듣고 있는 중이기도 하고. 

하지만 나는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방심하고 있었다. 네 살이니깐. 떼와 고집과는 다른  

"이것만 하고 잘게요"라는 시크한 아이의 대답은 예상치 못한 어퍼컷이었다고나 할까. 

'아! 컸다. 이건 분명 컸다는 뜻이야!' 

어제까진 한 번도 한 적 없던 말로 이렇게 사람을 놀래키다니.     

 곧 "엄마, 그건 제가 알아서 할 거예요."  "아빠 전 그렇게 안 할 거예요. 제가 생각해 놓은 게 있단 말이에요." 따위의 말을 하며 두 눈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볼 아이의 모습이 불현듯 상상이 된다.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자신을 대우해 달라는 듯한 아이의 저항이, 또 그런 아이를 보며 이마를 짚을 나의 모습이 뻔하게 그려진다. '아, 이젠 올 것이 왔구나!' 하며 가드를 올릴 내 모습이 어쩐지 가련해 웃음이 난다. 뭐랄까. 항복의 미소랄까.   


  

아직 오지도 않은 순간이지만 난 벌써부터 백기를 들 준비를 한다. 

반항 다운 반항, 저항 다운 저항을 하기까진 한참 멀었을 테지만 벌써부터 백기를 꺼내놓기로 했다. 그것은 '올챙이적 시절을 잊지말라'는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기도 하다.

'자식으로 살 때 너의 모습이 어땠는지 기억 안 나?' 뭐 대충 그런 뜻. 

고분고분한 자식으로 부모의 말에 순응하며 살지 않아놓고선 내 자식에게 그러한 것을 바란다는 것은 오만.

25년 정도 차이 나는 엄마를 보면서도 '세대 차이'를 그렇게나 느꼈는데, 나와 아이 사이 벌어진 세월은 31년이나 되지 않는가. 게다가 속도의 시대에 살고 있으니. 모르긴 몰라도 아무리 쫓아가려 노력한다고 한들 세월의 차이를 쉽사리 극복할 순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자, 그럼 고민해 보는 거다. 과연 어떤 부모여야 할까. 나는 과연 어떤 부모가 되길 원하는가. 내 부모에게 무엇을 진정으로 바랐는가를 떠올려보면 어렵지 않게 답을 찾을 수 있으려나. 자식의 입장으로 살아봤으니 그때를 떠올리면 되겠다. 

내 엄마에게 바랐던 것들을 쭉 적어보면 되니깐. 내가 자식으로 살면서 부모에게 가장 바랐던 것을 생각해 보면 되니깐.

아직 부모로 산 세월보다 자식으로 살았던 세월이 더 기니 이참에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거다.     


 

자식 된 입장으로 부모에게 바랐던 것 중 단연코 일 등은 내가 부모의 모든 것이 되지 않는 삶이었다. 

넌 나의 꿈이며 희망이라는 말. 겉으로 보기엔 자식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담겨있는 듯 보이지만 자칫 잘못하면 폭력이 되어버릴 수도 있을 말. 

"네가 나의 꿈이며 희망인데, 넌 어쩜 그것밖에 못해주니?" 

"내가 너한테 해준 게 얼만데." 같은 말로 변할 확률이 무척 높은 말이 바로 그러한 종류의 말이라고 생각한다. 엄마가 가끔 내게 했던 '넌 그런 식으로 하면 내 자식도 아니다'라는 말 역시 같은 맥락인 것이다.     


나는 엄마가 "운전면허는 좀 따 볼까 봐"라고 이야기하며 운전면허 책을 샀을 때 무척 기뻤다. 친구들이랑 같이 여행을 좀 다녀오려고라는 말이 반가웠다. 늦은 밤, 잠이 오지 않는다며 책 한 권을 엎드려 읽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우리 엄마가 책도 다 읽네' 하고 흐뭇하게 웃었다. 자유로워 보일 때. 스스로의 삶에 자유를 부여할 때. '해야 하는 일'이 아닌 '하고 싶은 일'도 하며 산다는 것이 느껴질 때. 비록 생계를 지켜내는 일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한정적이지만 기꺼이 자유를 누리겠다는 결심을 어렴풋이나마 보여주었을 때. 

한정적인 엄마의 자유를 조금 더 넓혀주는 자식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에게 난 꿈이자 희망일 때엔 하지 못했던 결심을 자발적으로 하게 되는 것이었다. 

"아, 열심히 공부해야지." 자연스레 내 삶에 충실할 수 있었다.      


자식 된 입장으로 가장 슬펐던 순간은 부모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나'라는 사실을 문득 인지할 때였다. 부모의 희생 덕분에 내가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할 수만 있다면 부모님의 손에 다시 쥐어드리고 싶었다. 본인의 돈, 시간, 마음, 여유..  그러니깐 훨훨 날아갈 수 있는 자유를.

나는 내 부모가 자신을 더욱 살뜰히 챙기길 바란다. 엄마의 꿈은 엄마의 삶 안에서 찾으면 좋겠다. 내가 잘 사는 것은 엄마의 꿈이 아닌 기쁨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나도 엄마가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기쁨을 느끼고 싶다. 부모님이 내게 주었으면 하는 가장 큰 선물은 돈도, 집도 아니다.  엄마, 아빠가 자신의 삶에서 자유를 느끼며 행복하게 사는 모습이다.  자식이 잘 사는 것이 부모의 가장 큰 바람이듯, 부모가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지내는 모습, 그 자체가 자식에겐 더할 나위 없는 삶의 지침서 같은 것이 될 수도 있다.      



부모의 도리는 지키되 내 삶을 잃지 않는 엄마가 되고 싶다. 

엄마인 내 삶을 진정으로 아껴줄 수 있을 때, 자식 역시 자신의 삶을 와락 껴안을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믿는다. 

'넌 나의 꿈이자 희망이야.' '널 위해 내 모든 걸 내줄 수도 있어' 따위의 말로 아이를 움직이게 하고 싶지 않다. 아이는 결코 그런 말로 움직이지 않을 거란 것을 이미 잘 알고 있기도 하고. 자신의 삶에 뛰어들어 스스로 발을 움직이게 하는 자발성은 결코 타인이 해 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삶에 기꺼이 뛰어들어 부딪히고 깨지며 한계를 처절하게 깨닫다가도 또다시 벌떡 일어서서 제 길을 걸어가는 힘은 단연코 내부에서 길어올릴 수 있는 그 무엇인 것이다. 그런 내부의 힘은 아무리 외부에서 끌어올려 주려 한들 길러지지 않는다. 결국 스스로 끌어올릴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외부의 도움은 그 후에나 먹히는 것들이다.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도 꽤 매력적이라는 것을 아이에게 알려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해 본다. 

주절 주절, 식탁 앞에 앉아 이야기한다고 한들 먹힐 것 같지 않으니 말은 줄일 수 있는 한 줄이는 방법으로. 

말로 할 수 없는 것은 결국 행동으로 보여주는 수밖에. 

아, 그렇다면 결국 나부터 내 삶에 주체적이어야 하겠구나.

엄마가 살아가는 모습이 아이에겐 생의 나침반 같은 것이 되어 줄게 분명하겠구나.  

방향을 잃을 때마다 꺼내 볼 수 있는 생의 나침반. 자연스러운 인도. 보이지 않는 안내자. 

기꺼이 그러한 것들이 될 수만 있다면 부모로서 나 스스로에게 만족스러울 것 같다.      



자유로워야겠다. 

내 삶엔 수많은 역할이 있고, 그중 하나가 엄마인 것이다. 

엄마라는 역할이 내 모든 것을 지배하려고 들 때, 나는 감옥에 갇히고 만다. 

그리고 아이에게 말하겠지. 내가 이렇게까지 하면서 너를 키웠노라고. 이젠 너 차례니 나에

게 너의 삶을 내어달라고. 자유를 빼앗긴 자가, 어떻게 타인의 자유로움을 환대할 수 있을까.      


너는 너의 삶에 주인공이 되고, 나는 나의 삶에 주연이 되는 삶.

그것은 너는 너, 나는 나의 무관심에서 흘러나온 마음이 아니다. 

서로의 삶을 진정으로 존중한다는 뜻.인정해 준다는 말. 

네가 하늘을 훨훨 날 수 있을 때까지 옆에서 수없이 많은 날갯짓을 보여주겠다는 것. 

신뢰의 다름 아닌 그런 말. 그것은 결국 사랑인 것이다.     


모자라도, 지나쳐도 독이 되는 사랑 앞에서 나는 때때로 깊은 고민에 빠진다.  

그리고 늘, 같은 결론을 낸다. 

아이가 자라는 것만큼, 나 역시 자라야만 한다고. 

삶의 아름다운 균형은 그러할 때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서로의 자유를 지켜줄 수 있는 삶의 거리를 찾으며 살아가야지. 

각자의 자리에서 훨훨, 눈부시게 빛나는 날갯짓을 할 수 있게 말이다.  

서로의 날갯짓에 힘을 얻으며 그 어떤 바람도 가를 수 있도록.


이전 11화 가장 근사한 타인,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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