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빨래
게스트하우스 스태프로 근무한 지 3주가 넘었다. 이곳의 시간은 육지랑 다르게 가는지 왜 아직 3주밖에 안 지난 것 같지.. 그동안 일도 하고 여행도 다니고 많은 걸 했는데.
우선 내가 지내는 이곳은 제주도를 지도로 놓고 봤을 때 남쪽, 그러니까 서귀포시 남원읍에 위치해 있는 게스트하우스. 이곳의 복지를 자랑하자면 숙박은 물론 말씀드리는 대로 신선한 식재료들이 제공되고 가끔 사장님께 부탁드리면 조금 먼 환승버스정류장에도 차로 태워다 주시고 현지인 맛집에도 데려가 주신다. 근무시스템은 주 4일 근무하는데 매주 휴무 신청을 받아 매니저님이 근무 스케줄을 짜주신다. 하루에 근무하는 스탭은 많아야 2명이지만 조식 근무자, 디너 근무자 이렇게 나뉘고 혼자 근무 일명 "혼근"을 하는 날은 스탭 한 명이 조식과 베딩(침구 교체와 정리) 그리고 주로 투숙객의 체크인을 도와주는 디너 근무까지 한다. 이 경우 청소업무는 매니저님이 해주신다.
조식 근무자는 아침 조식 세팅과 투숙객이 퇴실하고 나면 베딩을 하게 된다. 아침 조식은 8시 30분부터 9시 30분까지 이용할 수 있어서 근무자는 늦어도 8시 20분에는 공용공간에 출근하여 간단한 청소를 하며 블루투스 스피커로 잔잔한 음악을 틀고 전 날 설거지 정리 그리고 아침식사 세팅을 해야 한다. 음악은 아침에 듣기 좋으면서도 창밖 감귤나무 풍경과 어울릴 재즈 혹은 블루스 음악들을 골라 유튜브로 스트리밍 한다. 근무자 마음대로 고른다. 아침식사는 토스트기와 함께 식빵과 잼&버터, 체크무늬 시리얼과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는 시리얼을 우유와 함께 준비하면 투숙객이 자율적으로 챙겨 자리에 가져가 먹으면 된다. 커피는 아메리카노 한 가지 준비되며 아이스와 핫 둘 중에 골라 말해주시면 우리가 직접 로스팅한 원두가 아닌 사장님이 사 오시는 원두를 기계에 넣고 버튼을 눌러 내려드린다. 바쁘게 돌아가는 편이 아니라 커피를 내려드린 후엔 바깥 풍경을 보며 일명 감귤나무멍을 때리거나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린다. 조식 시간이 끝나면 설거지를 하고 에어컨과 음악까지 꺼 둔 후 잠시 쉬었다가 10시 퇴실이 완료되면 베딩에 돌입한다. 베딩과 이불 빨래를 얼마나 빨리 하느냐에 따라 내 오후 자유시간이 달라진다.
나는 이 이불 빨래를 한동안 애먹었다. 사장님이나 기존 스탭은 오후 2-3시면 마쳤는데 나는 어째서 5시에 끝나는지.. 위생용으로 쓰는 흰 천이 굉장히 잘 안 마르는데 5시에 간신히 말라도 건조기에서 꺼낸 직후엔 천이 무진장 뜨겁다. 과장이 아니라 이러다 손 데이는 것 아닌가 싶다. 그런데 그 뜨거운 천을 또 깔끔히 개야 하는데 우리가 빨래를 개는 곳은 에어컨이 없는 공간인지라 천 두 개만 개어도 땀이 뻘뻘 난다. 외출 안 하고 땀나는 게 생각보다 기분 나쁘다. 지금은 기존 스태프 친구에게 방법을 물어보기도 하고 나름 전략을 잘 짜서 3시 즈음 마칠 수 있게 됐다. 그래도 내 목표는 2시. 나는 내 오후 시간을 누구보다 알차게 보낼 자신도 있고 하루하루 제주 풍경을 눈에 담기 바쁘기에 2시에 얼른 마치고 외출해야 한다. 그게 내 제주살이의 사명이다. 이 이불빨래 작전은 될 수 있다면 전 날 밤부터 미리 구상해둬야 편하다. 퇴실 침구의 개수를 세고 어떤 침구류를 세탁기에 먼저 넣을 것인지, 그리고 그 사이 나는 어디로 외출할지, 외출 준비는 몇 시부터 시작할지 이 모든 것들을 미리 생각해둬야 내 조식 근무의 날을 알차게 보낼 수 있다. 물론 하루 온전히 쉬는 휴무도 있지만 조식 근무 날도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은 밖 순이의 요즘 최대 고민이다. 그런데 사실 중요한 건 운도 따라주어야 한다. 퇴실 침구의 개수가 5개가 넘어가면 오후 외출이 힘들어질 수 있다. 세탁기 시간은 물론 건조기 시간도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땐 그저 마음을 편하게 먹고 "오늘 외출은 헬스장만 가는 걸로 해야겠군" 하며 여유를 가지기로 한다. 욕심을 내고 외출을 했다간 많은 가게들이 일찍 문 닫는 아쉬움만 느끼며 돌아올 수도 있다.
이 근처에서 오후에도 가기 좋은 명소 몇 곳 추천하자면 첫 번째로 큰엉해안경승지가 아닐까 싶다. 숙소에서 버스로 40분 정도 소요되는데 금호리조트 바로 근처다. 나무들이 자연스럽게 만들어 내는 한반도 모양을 배경 삼아 사진을 남기고 좀 더 걸어서는 거센 파도가 부딪치는 바위 위에서 바닷바람을 맞을 수도 있다. 바람이 너무 센 날엔 내 몸에서 소금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은 덤이지만... 두 번째로는 서귀포 매일올레시장. 관광객을 위한 시장이라 늦은 시간까지도 운영을 하고 야시장까지 있다. 유명한 마늘통닭, 다양한 길거리 간식, 기념품, 과일가게 등 다양한 상점들이 즐비해 있고 시장을 중심으로 서귀포시내가 조성되어 있다. 서귀포에서 여행을 마무리한다면 서귀포 매일올레시장은 꼭 필수코스다. 마지막으로는 다소 멀긴 하지만 지미봉(지미오름)에서 보는 일몰이 색달랐다. 오르는 시간은 15분 정도로 짧지만 생각보다 매우 가파르기에 각오하고 가야 한다. 아니 운동복 차림으로 가도 된다. 오르면서 땀으로 옷을 적신 강렬한 기억이 남는다. 아무튼 지미봉에 오르면 성산일출봉과 우도를 종달리 마을 풍경과 함께 한눈에 담을 수 있고 다른 한쪽으론 낮동안 뜨거웠던 해가 드디어 지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괜시리 아쉬우면서도 이토록 눈부신 해님을 성가셔해서 미안해진다.
다가올 조식 근무 날엔 어디를 갈까. 아니, 우선 퇴실 침구 수가 적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 생각은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마치 응급실의 신입 레지던트가 "오늘은 환자가 별로 없네요?"라는 금기어를 말하자마자 바로 응급환자가 많이 생겨나는 상황이 발생하듯이 전 객실 모두 베딩을 해야 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으니 그저 마음속으로만 바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