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도 완전하게
제주에 온 지 만 한 달이 넘었다. 그 사이 내 피부색은 "여행 많이 다니셨나 봐요~"라는 제주도민분들의 공통적인 대사가 나올 만큼 많이 탔다. 자외선 차단제는 나에게 역시 무용지물. 물놀이하는 날엔 바닷속 산호초들을 보호한답시고 안 바르고 그냥 돌아다닐 때엔 땀으로 끈적여질 테니 또 안 바른다. 얘 그냥 귀찮아하는 거 아냐? 싶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정확하게 맞췄다. 어릴 때 촉감놀이를 많이 못해서 그런 지 손에 뭐가 묻는 것도 싫고 아니, 모두 각설하고 그저 귀찮다.
그렇게 27호 파운데이션으로 바꿀 정도로 뭐하고 다녔을지 궁금해하는 분들이 꽤 많다. 그것도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많이 기피하는 "혼자서".
하지만 오히려 혼자가 더 재밌다. 변덕을 부리는 제주 날씨는 뚜벅이 여행자들을 종종 난처하게 하는데 이때마다 타인과 상의하며 의견을 조율할 필요 없이 나 혼자 지도에 평소 여유시간이 생길 때마다 저장해놓았던 곳들을 찾아보며 "그래, 지금은 여길 가면 딱이겠군" 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타인과 의견을 맞춰가는 것은 상당히 귀찮고 이타적이어야 하며 상호 간의 배려를 필요로 한다. 서로를 잘 아는 사이라면 귀찮지도 않고 배려랄 것도 없지만 친하다고 하기엔 모호한 사이라면 오히려 멀어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사실 나는 20살 이후로 혼자 하는 것을 즐기기 시작했다. 대학교 시절 학교 식당(이하 학식)에서 혼자 밥(이하 혼밥)을 먹는 것은 은연중에 아웃사이더로 여겨질 만큼 다들 기피하는 성향이 있었는데 나는 2학년 2학기부터 복수전공을 시작해 동기들과 같은 수업을 듣는 날이 적어졌다. 그렇게 내 혼밥 시대가 시작됐다. 처음 혼밥을 시작한 날, 학식에 들어서고 내 레이더에 들어온 것은 사람들이 비교적 적은 테이블. 내 주변에 누가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어색하게 쭈뼛쭈뼛 가 앉았다. 그 마저도 누군가 날 쳐다보는 것 같아 빠르게 먹고 일어났다. 그렇지만 사람은 역시 적응의 동물 아닌가. 그렇게 진화를 해왔고. 어느샌가 집에서 도시락도 싸오면서 혼자 비빔밥도 먹고 고구마와 빵도 챙겨 먹었다. 동기들과 마주 앉아 밥 먹는 시간이 드물어졌다. 그렇게 혼자 할 줄 아는 것이 많아져 일본으로 혼자 여행도 다녀왔고 친인척 없는 교토로 워킹홀리데이도 다녀왔다. 이후엔 태국에도 3주 정도 혼자 다녀오며 더 단단해졌다.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게 많아지면서 이 1인 생활에 익숙해진 나머지, 최근엔 혼자가 아니면 불편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제주에 스태프로 와서 지내던 8월 초 어느 날, 제주의 햇살과 바다를 사랑하는 나는 이를 온몸으로 만끽하고자 이틀간의 휴무를 신청해 타 지역의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룻밤 자기로 했다. 이틀간 투명한 바닷속에서 물놀이도 하고 싶었고 오래간만에 혼자 서우봉 야경도 보며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렇게 간 함덕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타 게스트분들과 즉흥적으로 "우리 내일 같이 물놀이 가요!"라는 이야기가 오갔고 다음날 정신을 차려보니 선약이 있던 한 분을 제외한 나머지 우리 6명은 김녕 성세기 해변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갑자기 단체생활이 시작되어서 아주 살짝 당황스러웠다. 사실 난 전 날 코난 해변에서 혼자 태닝도 하고 물놀이도 짧게나마 했지만 맥주병이 아무 장비도 없이 하려니 다소 무리여서 30분밖에 하지 못해서 아쉬움이 남긴 했다. 그렇게 김녕 성세기 해변에 도착해 얼레벌레 장비를 대여하고 일행 중 스노클링을 잘하시는 분의 지도 아래 우리 6명의 스노클링은 시작되었다. 와, 스노클링이 이런 거구나! 하며 마음속으로 큰 감탄을 했다. 7월 초 여행 당시, 판포포구에서의 스노클링은 아무 생물도 안 보이고 물속이 뿌얘서 이번에도 큰 기대는 안 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바위틈 이름 모를 바다생물들의 세계가 보였다. 무리를 지어 다니는 물살이들도 단체생활을 하네... 여하튼 이 광경은 꼭 남겨야겠다 싶어 스마트폰을 육지에서부터 챙겨 온 방수팩에 넣고 바닷속을 촬영했다. 일행들은 자신의 팔뚝만 한 물살이를 봤다느니 나와 비슷한 물살이들의 무리 지어 다니는 모습을 봤다느니 각자 본 것을 실시간으로 나누었다. 아마 다들 제주에 와서 가장 큰 리액션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도 아무 생각 없이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처럼 "우와!", "여기 열대어들 있어요! 진짜 귀여워요. 더 보고 싶은데 빨리 사라져요" 라며 진심이 가득 섞인 말을 본 지 24시간도 안 된 사람들과 주고받았다.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해서 이렇게 재밌는 거라며 혼자 반성했다. 누구도 혼자 노는 것을 다그친 적은 없는데. 그러나 그렇게 헤어지는 줄 알았으나 이번엔 월정리로 휩쓸려갔다. 우선은 주린 배를 쥐어 잡고 각자 말없이 밥만 먹었다. 그런데 이후 갑자기 지쳤다. 물놀이의 여파와 혼자 있는 시간이 부족해서였던 탓인지 쉬고 싶어졌다. 마침 다들 이후 일정도 있고 가는 방향이 반대라 이제 헤어질 시간이 왔고 나는 혼자 보이는 아무 카페에 가서 디저트와 아메리카노를 시켜 내 마음을 다독였다. 1일 차엔 혼자 안 해본 태닝과 30분의 물놀이도 하고... 아! 함덕에서 흑돼지 맛집을 찾아 혼자 목살과 오겹살 구이 2인분도 해치우고 혼술, 그리고 서우봉에서 달 백개(실상은 한치잡이 배의 불빛 백개)도 보고 왔다. 그리고 2일 차엔 처음 만난 사람들과 투명하고 찬란한 윤슬을 자랑하는 김녕 해변에서 물놀이도 했다. 나만의 여행기를 되뇌기도 했다. 혼자 할 줄 아는 것이 늘어난 만큼 사람들과 행복도 나눌 줄 알게 된 것이 내심 기뻤다. 물론 여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지키고 싶어 하지만 즐거움은 나눌수록 배가 된다는 것이 사실이었다.
혼자서도 완전하게, 같이 행복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