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근무

늘 그렇듯 무사하고 무탈하게

by 지향

이곳에서 저녁 근무는 "디너"라고 부른다. 디너 근무자는 오전 10시 즈음 화장실과 객실 청소를 하고 낮 동안은 쉬었다가 오후 4시 40분에 다시 출근하여 객실과 공용공간 정비를 하고 5시부터 새로운 손님들의 체크인을 돕게 된다. 아, 이곳에서 간단하게 파는 주류와 피자 판매까지 담당한다.


나열법을 이용하여 설명하니 뭔가 많아 보이는데 이보다 더 한가로이 일해본 적이 없다. 일을 하는데 책을 읽어도 되고 인터넷 서핑을 해도 되고 저녁시간엔 밥을 해 먹어도 된다. 전제조건이라 해봐야 손님 응대를 안 할 때. 객실이 많은 편도 아니고 손님 개개인의 체크인 시간이 다 다르다 보니 바쁘게 몰리는 시간도 없다.


이 글을 쓰는 오늘은 디너 근무의 날이다. 오랜만에 만실에 모두 체크아웃해서 화장실과 객실도 전부 청소해야 했다. 점점 무릎이 아파온다. 화장실은 작은 공간에 내 몸을 구겨서 이곳저곳에 세제를 뿌리고 수세미로 문지르고 또 샤워기로 물을 뿌려 거품과 머리카락, 오염물질들을 씻어내야 하는 곳이다. 옷이 젖음은 물론이고 원래도 성치 않던 내 무릎은 운동부족과 스태프 방에서의 좌식생활, 베딩 그리고 화장실 청소로 더 약해져 점점 쿡쿡 쑤셔온다. 중장년층과 노년층의 아픔을 미리 체험하는 중이다. 그렇게 청소를 다 마치고 나니 오후 12시가 되기 15분 전이었다. 모두 퇴실해 아무도 없는 공용공간의 소파에 잠시 몸을 기대어 쉬고 나니 배가 고파져 휴무인 어제 사온 식사용 빵과 훈제오리를 볶은 것으로 점심식사를 해결했다. 창밖으로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과 하늘이 보인다. 며칠 내내 흐리던 하늘은 웬일로 개어 진정한 하늘색을 뽐내고 있다.


커피도 한 잔 내려서 홀짝이며 태블릿으로 책을 읽었다. 이곳은 정착지가 아니기 때문에 짐을 더 이상 늘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요즘엔 e-book을 이용하고 있다. 처음 태블릿을 구매한 것도 페이퍼리스의 삶을 살아보고자 한 것이니 이제야 제 기능을 하는 중이다. (원래 본가에서는 그저 넷플릭스 시청용이었다.) 요즘 읽는 책은 정진아 작가님의 <불완전 채식주의자>로 채식을 하고 싶지만 편식나라 대마왕인 내 입맛 탓에 쉽게 비건으로 전환이 안 되는 내가 공감할 내용인 것 같아 읽기 시작했고 역시 모든 문장에 형광펜을 칠하며 읽고 있다.


오후 3시 50분쯤, 점심에 먹은 것이 소화가 덜 된 것 같아 동네 산책에 나서기로 한다. 출근까지 50여분이 남았지만 30분이라도 걷고 오자 싶어 양말과 운동화를 챙겨 신고 일단 나왔다. 어딜 갈지는 안 정해도 나 같은 여행자에겐 마을 곳곳이 호기심으로 가득한 곳이다. 궁금한 곳이 아니더라도 뻥뻥 뚫린 길과 아무리 걸어도 보이지 않는 신호등, 낮은 높이의 구옥들 덕에 초록잎이 무성한 키 큰 나무들과 푸른 하늘을 실컷 보며 걸으면 내 눈과 마음도 한결 가볍고 시원해진다.



4시 30분쯤 방에 들어와 잠깐 산책한 사이 난 땀을 씻어내고 디너 출근 준비를 마쳤다. 5시 전에 와서 체크인을 기다린 손님의 객실 안내를 도와드리고 공용공간의 구석자리 한 모퉁이를 차지하며 이 글을 쓴다. 글이 쓰기 싫어지면 책 읽거나 SNS를 돌아다니며 요즘엔 뭐가 재미있나, 어디의 무엇이 맛있나 하며 찾아서 저장해두기도 한다. 그리고 가끔씩 오는 손님들의 체크인과 주류와 음식 주문을 받아낸다. 오늘 내 저녁은 며칠 전 제주시내에서 사 온 비건 흑임자 찹쌀파이와 두유. 사실 배는 안 고프지만 제 때 안 먹으면 밤 10시쯤 시리얼을 찾아먹을까 봐 미리 먹어둔다. 매일 저녁 8시 30분엔 빔 프로젝터로 영화를 트는데 오늘은 <건축학개론>. 영화엔 서연의 집이 배경이 되는 남원읍의 위미리도 나온다. 영화가 시작되면 영화 상영 중간엔 생각보다 손님이 잘 안 오니까 이따 팔 벌려 뛰기 하면서 오늘 먹은 음식들 소화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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