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진 찍기를 과히 좋아하지 않는다. 그저 기억하고 싶은 것들은 ‘내 머릿속에 저장’을 선호한다. 하지만 이제와 보니 많은 사람들의 의견은 역시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기록을 위해서도 추억을 위해서도 사진 몇 장쯤은 꼭 필요한 것이었다.
오늘 갑자기 그 외딴 해안가 마을이 떠올랐다. 오랜 기간은 아니었지만 일 년쯤 아이와 내가 머물렀던 바닷가 마을이 보고 싶은데, 실내에서 찍은 몇 장의 아들 얼굴 이외에 별 사진이 없다.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그곳이 생각난 이유는 그저 여름 날씨의 변덕스러움 때문이라는 정도쯤으로 해두자.
아들과 나는 그저 평범한 모자 사이라고 하기에는 살짝은 더 애틋한 편이다. 둘이서만 보낸 시간이 유독 많았기 때문이다. 일 때문에 해외로 나간 아이의 아빠이자, 내 남편의 부재는 상당기간 계속되었고, 그때마다 아이와 나는 단짝 친구처럼 둘이서만 지냈다. 서로 의지하고 보살피느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고, 아웅 댈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대신 저녁이 되면 언제나 조금은 쓸쓸했다.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 오전도 그랬는데, 집 앞 공원에서 아빠와 뛰어노는 아이들을 아들은 오래도록 지켜보곤 했다. 역시 가족은 함께 있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한 법인가 보았다.
그래서 함께 있기로 결심했다. 짐을 싸서 열심히 쫓아갔는데, 삼 년 동안 도시를 두 번이나 옮긴 후 중국의 해안가 마을에서 다시 헤어졌다. 남편이 또다시 다른 곳으로 옮겨갔기 때문이었다. 도리가 없는 일이었고, 우리는 새로 이사한 지 겨우 두 달 여 만에 허무하게 둘만 남겨졌다. 사노라면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허전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처음 살았던 상해에 이어 두 번째로 이사한 도시는 대련이었다. 지금이야 대련도 엄청나게 변했겠지만, 십 수년 전 그때는 상해에 비해서 모든 면이 열악했다. 우리는 나름 스페인 풍의 이국적인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아파트의 이름은 중국어로 ‘태양의 집’이었다. 단지 내에 제법 정교한 피카소의 ‘게르니카’ 모조 벽화가 크게 그려져 있었던 태양의 집은 도심과는 꽤 떨어진 해안가에 위치했다.
셋이서 살 때는 그 해안가가 좋았지만 아들과 덜렁 둘이 남겨지니 사실 별로였다. 앞에는 바다, 뒤에는 기찻길이 있어, 어떨 땐 파도소리와 기차의 경적소리가 함께 들리는데, 묘하게 어우러지며 쓸쓸한 느낌을 풍겼다. 바다에서 밀려오는 해무도 엄청났다.
아들이 학교에 가고 나면 나는 날마다 시장에 갔다. 택시를 탈 수도 있었지만 언제나 해변도로를 달리는 버스를 일부러 탔다. 상해에서 산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큰 선글라스를 낀 채 버스에 오르면 낯선 느낌이 들었는지 모두들 일제히 쳐다보곤 했다. 바다는 푸른빛 이라기보다는 검은 쪽에 가까웠고, 해변의 정취는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털썩대는 버스에 앉아 해안가 도로를 달리는 내내 나는 ‘참 사람 인생은 알 수 없다. 내가 이런 외딴 해안가 마을에 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는데.....’ 하고 생각했다. 중심가 백화점 슈퍼에서도 상해에선 그렇게 흔했던 베이컨이나 냉장 우유 등을 구할 수 없었다. 대신에 시장에는 납작 복숭아라든가 망고, 체리 같은 신선한 과일들이 지천이었다. 시장 상인들은 나를 ‘큰 안경의 여자’라고 불렀다. 단골상점도 생겼다. 아들과 나 둘 뿐이라 먹을 사람도 없었지만, 속이 빈 마음에 나는 꽤 많은 양의 과일과 식품류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이제 막 문을 연 하나뿐인 스타벅스에 들렀다. 현지인들은 별로 없었고, 나처럼 우연히 그곳에 와 살게 된 외국인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커피 맛은 스타벅스 그대로였고, 나는 매일매일 그곳에 가서 커피를 마셨다. 돌아가게 되면 다시 이곳에 오고 싶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어쩐지 아닐 것 같았다. 무엇보다 아이가 아프면 데려갈 마땅한 병원이 없어서 안정감이 들지 않았다. 훌륭한 중의들은 많았지만 안과 같은 곳이 문제였다. 안질이 걸린 아이의 눈에 소독용 요오드를 흘려 넣던 일도 있었다. 사람이 그리워서 늘 그곳에 사는 아들 친구 엄마들과 자주 어울렸고, 함께 곧잘 밥도 먹었다.
어느 곳이건 내가 사는 동네가 최고라는 신념의 소유자인 나는 사는 내내 분명 대련의 해안가 마을을 사랑했을 것이다. 기억과 추억이 반반쯤 혼재된 지금의 내 감상이 그곳의 색채일 수는 없다. 사실 바닷물은 지극히 푸르렀고, 해변은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떠들썩했을 수도 있다. 아들에게 한번 물어볼 일이다. 아들은 나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그곳을 기억하고 있을 수도 있다. 너무 아름답고, 축제같이 즐거운 마을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