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되면 내가 꼭 챙겨 먹는 과일이 있는데 무화과 열매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 눈에 잘 띄지도 않고, 무화과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도 많아서 은근히 서운했었다. 그런데 그 자주색 열매가 요즈음 때가 되면 슈퍼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어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아주 짧은 한 계절에만 맛볼 수 있는 무화과를 먹으면 어쩐지 든든해진다. 어렸을 때의 입맛을 되찾은 기분인 것이다.
식물과 가까운 사람들이 꼭 있다. 아빠가 그랬고 남편 역시 그렇다. 난 나만 아는 이기적인 인간형이라 사실 동물이건 식물이건 큰 관심이 없다. 집안의 화분 가꾸기도 잼병이다. 내게 맡겨 놓으면 제대로 자라나는 것이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가만히 앉아 집안의 식물들에게 가지도 치고, 물도 주고, 영양제도 꽂아주는 뒷모습의 남편을 보면 아빠가 생각난다.
우리가 어렸을 때 살던 곳은 울산이었다. 그곳에서 엄마와 아빠는 만나 연애도 하고 결혼도 했다. 그리고 울산에서 결혼 후 처음으로 집도 장만했다. 아빠는 원래 경제관념이 없는 편이라 부동산 보는 눈도 별로라고 했었는데, 역시나 친구 말만 듣고 덜컥 사들인 집이 도로보다 낮은 지대였다. 엄마는 그걸로 내내 아빠에게 집 보는 눈이 없다고 눈총을 줬다. 도로 보다 낮은 집은 사실 비가 와도 문제였고, 사는 내내 늘 하수처리로 골머리를 앓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건 현실적인 부분이었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아빠는 놀라운 금손이어서 이사 후 얼마 되지 않아 그 집을 동네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으로 꾸며놓았다.
초록색 나무 대문에 작고 여린 들장미로 담장을 두르고, 아기자기한 온갖 들꽃들을 집 앞마당에 심어 집은 밋밋한 원래의 그것보다 훨씬 가치가 있어 보였다. 지대가 낮았지만 늘 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이쁜 정원은 골목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눈요기 감이었다.
나는 한 살 때 그곳으로 옮겨갔고, 동생은 그곳에서 태어났다.
아빠는 남매를 둔 젊은 아버지였고, 아주 어렸을 때 본인의 아버지를 여읜 홀어머니의 자식이었으므로 뭔가 낭만적인 가정의 이미지를 꿈꾸고 있었다.
집과 정원을 가꾸자 아이들을 위한 나무가 심고 싶어 졌을 터였다.
나무도 고심하여 골라 선택했다.
그래서 나를 위한 무화과나무가 심겼다. 동생이 태어나자 등나무를 심었다. 우리는 이름을 따라 무화과는 진이 나무, 등나무는 원이 나무라고 불렀다. 나무들은 비실대는 듯하더니 어느새 우리보다 훨씬 빠르게 높이 높이 자라나 꽃도 피고 열매도 맺었다. 무화과는 넓은 이파리에 햇살만 받으면 푸르게 빛이 났고, 등나무는 아주 이쁜 눈물 같은 보랏빛 꽃을 피웠다. 그것들은 바람을 막아주고,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동생과 나는 서로 자신의 나무가 더 멋있다고 자랑했다. 내 생각에는 꽃만 이쁜 등나무에 비해 무화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무화과는 꽃을 피우지 않는 이상한 나무였다. 하지만 가을이 되면 진한 자주의 열매가 빠짐없이 열렸고, 그 자리에서 따먹으면 맛이 그만이었다. 동생은 무화과를 먹을 때마다 샘을 냈다. 나는 마당에 서 있는 그 나무가 정말 나와 같이 자라는 동갑 나무라고 여겨졌고, 무화과나무 아래서 하릴없이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무화과를 보면 기분이 이상하다. 마치 그것이 나의 형제인 거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곤 한다.
작은 아이였던 내가 서 있어.
나의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뱅글뱅글 돌면서....
봄, 여름, 가을, 겨울,
우리는 함께 자라나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한 뼘, 두 뼘, 세 뼘
그러다 아주 높이 뻗어 나
진하게 익은 자주의 열매를 떨구네.
나의 무화과나무, 형제 같은 그것-
그곳에서 무화과와 살았던 세월은 십수 년쯤이다. 그다음 이사 간 집은 마당이 없었고 시멘트 바닥이었다. 정원 가꾸기와 하수처리로 골치를 앓던 엄마와 아빠는 집을 지을 때 마당을 아예 시멘트로 발라 버렸던 것이다. 나는 어느새 다 잊어버리고 별 아쉬울 것이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마당이나 나무 등속은 아이들에겐 근사한 한 자락 추억을 선사하는 아이템인 거 같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무화과는 내게 꼭 달라붙어 있다. 피를 나눈 형제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