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오래된 반지가 있다. 주로 중지에 끼고 다니는 그 반지의 돌 색깔은 아주 투명한 오렌지색이다. 너무 많이 끼고 다녀서, 얼핏 보아도 낡아버린 반지가 딱 맞게 끼워져 있는 내 손을 보면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진다. 내 손과 어울리는지 아닌지 그런 건 좀 뒤로 하더라도 엄마의 반지라는 정체성이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가 보다.
엄마는 어린 시절부터 내내 그 반지를 탐내던 나를 못 본 채 하더니, 결국 한참의 시간이 흘러 서른도 넘어서야 손에 쥐어주며 사실은 결혼반지라고 말했다. 이 오래된 반지가 뭐 그리 좋으냐며 살짝 아쉬워하는 기색을 비치기도 했던 거 같다. 결혼반지로는 빛깔이나 디자인이 너무 생경해 선뜻 믿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반지는 내 것이 되었다.
반지의 생김새가 정말 마음에 든다. 모양을 보면 세월이 묻은 백금이 꽃 이파리처럼 투명한 오렌지 돌을 둘러싸고 있는데, 그 오렌지 빛깔의 보석은 똑바로 앉아있지 못하고 갸우뚱 비스듬히 고개를 젖히고 있다.
살짝 우습기도 하지만 성격이 아주 까칠해 보인다. 그렇게도 오랜 세월이 지났으나 최초의 반항기가 아직 남아있는 늙지 않은 못된 여자애 같다. 엄마는 그 반지가 기성품이 아니었으며, 결혼 전 생각한 디자인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엄마는 그저 엄마일 뿐 여자 냄새를 맡을 수 없었던 내게, 엄마가 여자로 훅 다가왔다.
그 시절 젊은 부부는 아마도 독특한 취향의 소유자였으리라....
반지는 그들의 개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늙지 않았다. 변하지도 않았다.
도리어 시간이 흐를수록 특별한 느낌을 더해가며 내 손가락에 남아있다.
누군가의 인생을 담고 있는 빈티지한 보석이란 이런 것일까? 나는 그 반지가 내게 전하는 또렷한 속삭임을 들을 수 있다. 어색한 첫 만남 후 둘은 사랑을 시작했고, 함께 살아가기로 마음을 모았다고 말해준다. 젊었던 두 사람의 사진이 생각난다.
짧은 커트머리의 날렵한 여자와 다소 유약해 보이는 남자는 등대를 배경으로 멋을 부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앞날의 설렘과 서로를 향한 애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무릎이 환히 드러나는 엄마의 짧은 치마가, 그 철 모를 발랄함이 시간의 무상함을 내게 말해준다. 사진에서 보이진 않지만, 나의 반지도 그날 그들과 함께 했을 것이다. 눈물이 날만큼 찬란한 시절이었다.
살아보니 인생은 정말 휙 하고 지나가 버린다. 세월은 바람과 같고 번개와도 같다. 후르르 떠밀려 살아지고, 삶을 조각내는 순간들은 번쩍하고 후려쳤다 사라진다.
한 사람은 이미 떠나고 이제 한 사람만 남았지만 그저 한 두어줄 짧은 이야기로 기억될 뿐이다. 반지와 함께 했던 그들의 모든 순간도 서서히 잊혀간다.
그러고 보니 나에겐 이 반지를 물려줄 딸이 없다. 사라지지 않는다면 누군가의 손에서 반짝이게 될지도 모른다. 그 사람은 엄마의 반지가 담고 있는 무수한 이야기를 느낄 수 있을까? 느낀다면, 아껴 줄 테고, 엄마의 반지는 다시 영롱한 빛을 내게 될 것이다. 새로운 유전자의 다른 이야기를 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