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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아 Aug 17. 2020

실패를 복기하다



나는 실패한 시간의 복기자다.

끊임없이 돌아가는 오토리버스처럼 실패와 슬픔의 시간을 무한 재생으로 복기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좋은 기억은 오래 간직하고, 힘든 기억은 빨리 잊어버리라는 사람들의 충고에도 이 고집스러운 습성을 버리지 못한다. 도리어 그 시간들을 잊어버릴까 봐 자꾸 새기고 떠올리는 것이다. 

나름의 이유는 확실한데, 그건 비겁해 지기 싫은 까닭이다. 살면서 빛나고 아름다웠던 시간과 마찬가지로 실패의 시간 역시 그것을 생산해 낸 주역은 나이므로 차마 그 순간을 외면할 수 없다.     

어이없지만 가끔은 패전의 증거품과도 같은, 실패의 상징물들을 곁에 두고 자주 꺼내 보기도 한다. 그날의 나를 잊어버리지 않겠다는 의식인 셈이다. 


하루에도 십 수 번은 여닫는 부엌 싱크대 위칸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는 분홍 뚜껑의 작은 약병이 놓여있다. 문을 열 때마다 시선이 향하는 위치에 놓여있는 약병은 보는 순간 자동적으로 움츠러드는 자책을 불러일으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그 약병을 보며 괴로웠던 시간들을 압축적으로 회고한다. 

참으로 악 취미인 것은 휴대폰 사진갤러리에 보관되어 있는 한 장의 사진이다. 길게 꼰 휴지를 한쪽 코에 틀어막은 채 시체처럼 누워있는 내 모습인데, 보는 사람마다 질색을 하지만 지우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 사진을 보면 내가 너무 못생긴 골룸 같지만 그런대로 견뎌낸다. 


그 외에 지금 봐도 얼굴이 붉어지는 민망한 메시지들이며, 배반의 흔적들은 또 어떠한가! 

생각할수록 쪽이 팔리고, 후회가 밀려오지만 꾸역꾸역 복기한다. 나는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의 원인이 나 자신에게 있다고 믿고 있으므로, 왜 그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때로는 생각의 조각들이 너무 먼 곳까지 날아가 뒤죽박죽 엉키기도 하지만 멈출 수가 없다. 시간이 흐르면 기억은 변하기도 한다지만 핵심은 고스란히 남기 마련이어서, 납득할 만한 온전한 이유를 찾아낼 때까지 성실히 되새긴다. 이 무슨 집착 쩌는 습관인지, 고약하게 여겨지지만 고쳐질 것 같진 않다.






그런데 정작 신기한 것은 그런 실패의 기억들이 나를 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돈의 법칙에 해당되는 것인가? 

엉클어지지 않고 차곡차곡 정리된 실패의 기억들은 깨끗하게 세탁되고 정갈하게 개켜졌기에, 기억 서랍 속 명품으로 탈바꿈하는지도 모르겠다.     

좋은 추억과 달리 쓰린 기억들은 누구와도 공유하기 어려운 법이다. 

매몰차게 버리거나 아니면 내 안에서 내밀하게 화해하고, 쓰다듬을 수밖에 방법이 없다. 

버릴 수 없다면 나의 이 짓궂은 방식이 때로는 효과적일 수도 있겠다. 다만 마음을 좀 단단히 먹고, 못돼 먹은 냉담한 감성을 키워야만 기억에 끌려 다니지 않을 수 있다. 

객관적일 수 없다면 복기는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못나고 삐뚤어진 우리의 아픈 시간들도 어떻게 다독이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독특하고 귀한 나만의 상징으로 재창조될 수 있다. 그저 단순한 반성의 차원은 절대로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실패는 무한정 복기해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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