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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아 Aug 28. 2020

선호의 공간

 



내가 매혹된 단 하나의 공간은 절의 방이다. 미니멀리즘 같은 미학적 요소도 물론 영향을 미쳤겠지만, 그보다 끌렸던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전함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불교 신자가 아니므로 사찰에 관한 추억은 거의 없는 편이다. 다만 아직까지도 절 방에 대한 애틋한 장면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젊었을 때 사나흘 머물렀던 월정사의 기억 때문이다.     


삼십 년도 더 전의 일이니 템플스테이 같은 프로그램은 물론 아니었다. 그저 주지스님께 부탁하여 손님방으로 쓰이는 요사 채에 사나흘 머물렀을 뿐인데, 너무 좋았던 것이 내게 주어진 공간이었다. 텅 비어 있었고 간소한 이부자리 한 채가 다였다. 초겨울이었으므로 바닥은 절절 끓어 위는 차고, 아래는 따뜻한 그야말로 천국의 잠자리를 제공했다. 젊은 나이였기에 불편했던 단 한 가지는 방에 거울이 없었다는 것 정도였다.


신기하게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많은 것들이 오고 가는 방이었다. 문살 틈 사이로 겨울 빛이 나지막이 들어섰다 사라지면, 오래 묵은 나무 냄새가 슬금슬금 스며들고, 찬바람의 예민하고 시린 공기가 빠르게 스치듯 다가오는데, 그것들의 들고남을 방해하는 요소는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서, 또한 모든 것을 순하게 배웅하는 절 방은 내가 느끼기에 공간의 완전체처럼 느껴졌다. 안에 있어도 밖에 있는 듯 시원했고, 문이라도 살짝 열어보면 온갖 세상이 성큼 내게로 다가왔다. 아무것 하나 아쉬울 것이 없으니 완전했던 것이다. 어느 누구라도 그때 그 시간, 나와 함께 했다면 그곳에 매혹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 역시 일상에서 채우는 것보다는 비우는 것에 집착하는 편이다. 싱크대도 위 칸 하나 정도는 아무것도 없어야 편안하고, 냉장고도 반 이상은 여유 있는 것이 좋다. 옷도 한 벌 사면 두벌 정도는 버린다는 규칙을 세워놓고 있어 일종의 강박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집이라는 공간에 물건들이 밀고 들어오는 것이 너무나 답답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비슷한 이유로 방에 침대들이기를 거부한 지도 십 수년이 넘었다. 이부자리를 펴고 개는 수고가 성가심에도 불구하고, 그 행위는 분명한 가치가 있다. 우선 잠들 때면 바닥에 허리를 딱 붙이고 잠드는 안정감을 맛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아침이면 잠자리를 치울 수 있어 방은 오롯이 그것만의 넉넉함을 간직할 수 있다. 빽빽하지 않고 텅 비어있는 여유를 확보하는 것이다. 지금도 빛 좋은 오전, 빼꼼히 열려 있는 문틈 사이로 그 어느 것에도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공간을 엿볼 때면 마음 귀퉁이가 풀리는 한숨이 새어 나온다. 비어있어 도리어 가득한 느낌이다.


이러한 나의 선호들이 물건을 멀리하는 검박함이나 모든 것을 내려놓는 마음 비우기 쯤으로 오인될 수도 있는데, 사실 정반대의 의도이다. 도리어 욕심이 너무 많기 때문에 생겨난 취향인 것이다.


나는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서지는 않지만, 나를 향해 다가오는 새로운 것들은 내치지 않는다. 찾아 나서는 적극성이 없기 때문에 도리어 더 반가울 때도 많다. 언제나 의외의 만남이 예측된 그것보다 짜릿한 즐거움을 선사하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내게 있어 공간 비우기는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욕망이 되고 기다림이 된다. 

비우지 않으면 내게 찾아온 그 어떤 반짝이는 것도 반갑게 맞이할 수 없다. 

비우지 않으면 무엇이 내게 가장 신선한 것인지 알아차릴 수도 없다. 

공기가 드나들고 느낌이 드나들고, 시간이 드나들 수 있도록 공간도 마음처럼 비워야만 날이 서 있을 수 있다.

비워놓고 내내 여유롭게 기다리는 것, 그래서 내게 자유롭게 말 걸 수 있도록 활짝 열어놓는 일. 

내가 욕심낼 수 있는 것이므로 포기하지 않는다. 

문득 월정사의 그 방이 아직도 그대로인지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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