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 위의 집으로 이사 왔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집과 근처 동네를 들락날락 왔다 갔다 하는 수선스러운 습성을 가진 내가 집을 나서 작고 번화한 상점거리를 오가는 길에 어쩔 수 없이 무조건 언덕과 만나게 된 셈이다. 처음 몇 달은 숨이 가빴고 힘이 들었다. 사실 좀 성가시기도 했다. 어쨌든 짐을 들고 걷는데 평지와는 달리 언덕길은 체력소모가 배는 더한 거 같았다.
걷기에 미쳐 있으니까 걷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었고 이렇게 계속 힘이 들어 집이 있는 동네에 정을 붙이지 못할까 걱정이 되었다. 사실 주변에 불편한 동네라고 구시렁거리기도 했고 다시 이사를 한다면 어디로 가야 할까 궁리하기도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몸이 익숙해질 때까지 한 번도 꾸준한 운동을 해보지 못해 느낄 수 없었던 것이 체험으로 다가왔다. 육 개월쯤 시간이 흐르자 언덕길이 더 이상 힘들지 않은 것이다. 도리어 슬그머니 그냥 평지를 걷는 것보다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경사진 언덕을 오르는 일이 숨차지 않고 편안해 지자 왜 사람들이 운동에 전념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사실 언덕길 한쪽으로는 까마득해 보이는 계단이 하나 있었는데 거리나 시간으로만 따지면 집으로 가는 가장 직선코스이다. 이사 온 초창기 몇 번 그 계단을 오르내리다가 나도 모르게 욕이 나올 뻔한 적도 있었고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를 놓아달라고 구청에 직접 건의를 할까 망설인 적도 있었다. 그처럼 그 계단은 내게 가혹했다. 도저히 친해질 수 없는 유전자를 갖고 있었다.
그러던 내가 지금 민망하게도 그 계단을 아낌없이 사랑하게 되었다. 그 마음이 너무나 단호하고 확실해서 나조차도 당황스럽다. 한두 번의 도전이 극복으로 이어져 내게 변심을 불러일으켰던 셈인데 심지어 계단을 오르면서 노래 부르듯 하나 둘 셋 하고 숫자를 센다.
다 세어보면 계단은 93개이다. 처음에는 한 번에서 두 번쯤 걸음을 멈추고 쉬어야 했지만 지금은 단숨에 오를 수 있다. 이처럼 까마득했던 계단을 사랑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계단을 오르고 나서 마주치게 될 언덕 위의 풍경 때문이다. 타박타박 93개의 계단을 다 오르는 순간 가쁜 숨을 잠시 몰아쉬면 촤르륵 도심의 마천루가 내 눈앞에 펼쳐진다. 시시각각 다른 컬러의 하늘을 배경으로 쑥 들어와 박힌다. 천천히 하나하나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불쑥.....
마치 성급한 고백 후 다짜고짜 안기부터 하는 남자처럼 그렇게 와락 다가온다. 엄청 기분이 좋고 가슴이 설레기 시작한다. 계단을 올라 선 시간이 해 질 녘이면 그 설렘은 배가 된다. 저물기 시작하는데, 나는 언덕에 서 있는데, 바라본 도시의 풍경은 황홀하다. 사람을 감성적으로 만드는 그 장면은 내게서 늘 현실감각을 빼앗아 버린다. 계단의 끝이 이처럼 로맨틱해도 되나? 이 정도면 충분히 언덕길은 사랑할 만하다. 오래오래 이 길을 오르내리게 될 거다. 떠나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