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위해 말해야 하는 이유/ 관계를 살리는 자기표현
가수 이효리의 ‘유 고 걸(U-Go-Girl)을 패러디한 ’ 유교 걸‘은 장녀가 주인공이다. 제삿날 부름에 ’ 족보에도
못 올라가는 댓 걸~ 재산은 따로 줄게 없는 걸 ~이라고 노래한다. “ 네 “ 이제부터 솔직하게, 이제부터 당당하게 ” 거부하라고 말한다. 조회수 90만 회를 기록한 유튜브 영상 댓글 창에 “ 내가 대한 장녀인지 대환 장녀인지 구분이 안된다” “찐 장녀는 경상도 장녀”라는 댓글이 달렸다는 기사를 읽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정말
솔직하게 자신이 겪고 있는 문제를 표현하는 재치가 있어 당당하다. ‘킹덤’과 ‘이장’이라는 영화에서 K- 장녀를 읽어낸 한 칼럼니스트는 K- 장녀의 특성으로 “ 쓸데없는 책임감, 심각한 겸손함, 습관화된 양보”를 꼽는다.
K- 장녀의 특성이 우리나라 대표적인 여성의 상징처럼 남아있다. 읽으면서 요즘도 그런가? 싶지만 문화란
생활 깊숙이 대물림된다는 면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기사를 읽으면서 속이 후련하면서도 답답하다. 내가 바로 “ 경상도 찐 장녀에, 그것도 모자라 3형제 맏며느리다. ‘ 친정이 종갓집 장손 집안이라 결혼하기 전까지 1년에 제사 12번씩 지내야 하는 친정의 몸 약한 친정엄마를 도와 집안일을 돕는 장녀 노릇을 했다. 제사라면 넌더리가 나는 이유가 있다.
살림 밑천 맏딸 ’인 장녀는 자녀들의 노동력이 자산이었던 시절 결혼할 때까지 어머니의 보조자로 집안일을
돕고 동생들을 돌보다 결혼 후에는 자신이 어머니가 되어 다시 자신의 가족을 돌보는 역할을 하고 산다.
하기 싫어도 장녀의 쓸데없는 책임감이 머리에 박혀서 하면서도 화가 난다. “ 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되지? ”
그게 안되니 자신에게 화가 나는 거다.
찐 장녀인 경상도 장녀들에게 물려주는 재산은 따로 없다. 지인 중에 청송이 고향인 분이 있는데 부모님이
그 지역에서 꽤 명망 있는 유지였다.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혼자 남은 어머니를 돌볼 장남에게 90퍼센트를 주고 딸들에게 1천만 원씩 유산으로 남겼다. 딸들은 속으로 할 말이 많았지만 누구 하나 문제 삼지 않았다.
장남은 혼자 거쳐를 청송으로 옮겨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곁을 지켰다. 어머니와 함께 살다 요양원에 들어가시고 난 후에는 하루 두 차례씩 문안을 다녔다. 경상도 장남의 역할이다. 부모님 제사를 정성으로 지내 드려야 함은 물론이다. 남아선호 사상과 장남을 우선으로 하는 문화는 특히 경상도가 강하다. 경상도 시댁을 둔 며느리들은 경상도 문화가 낯설다. 요즘 세상에도 그런 집이 있냐 생각할 정도로 남자는 손끝 까딱하지 않고 모셔지는 존재다.
머리 좋고 똑 부러지기로 소문난 내가 유독 자기표현이란 단어를 들으면 몸속에서 열감이 느껴지고 울분이
올라온다. 이성으로는 똑 부러지게 “ NO "를 하고 싶은데 길들여진 프로그램이 예전 방식대로 돌아간다.
매 순간 자각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도록 선택하기 힘이 든다. 특히 K- 장녀로 부모님이 심어 놓은
‘쓸데없는 책임감’은 어디서 어떤 역할을 하든 따라다녔다. 직장이나 모임에서 일을 맡아놓고 책임을 다하지
않는 사람을 볼 때 마음에 분노가 올라온다. 오빠가 있었지만 초등학교 때 서울로 전학 간 바람에 실질적인
장녀 노릇을 결혼할 때까지 했다. 책임과 오빠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한번 시작한 일은 끝까지 해야 한다는
책임은 삶을 무겁게 했고 몸에 긴장을 쌓는다. 맡은 일은 다른 사정이 생겨도 꼭 해야 할 일이었다. 부모님이
도움을 요청할 때 몸이 피곤해도 찾아봬야 한다. 남편이 가기 싫다고 하면 그의 의견을 존중하기보다 싸워서라도 함께 가야 속이 편안하다. ‘심각한 겸손함’ 앞에서 웃음이 나온다. 소위 말하는 명문대를 나오고도 남들 앞에서 겸손해하는 부모를 보면서 부모님은 내가 성에 차지 않나 보다 생각했다.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해 장녀
노릇에 최선을 다했지만 여전히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절망스러웠다. 부모님은
남의 자랑은 잘 들어주면서 나에 대해서 자랑하지 않으셨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심각한 겸손함은
나의 자존감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나에게 글을 쓰는 일은 ‘자기표현’의 중요한 수단이다. 글쓰기는 말로 하는 것보다 훨씬 내 마음 깊숙이 내재된 것들을 건드려 내 안의 다양한 감정과 하고 싶은 말을 표출하도록 돕는다. 처음 이 책은 자녀교육서로 쓰기 시작했다. 부모가 아이 말을 막고 표현하지 못하게 하는 사례를 실생활에서 찾아보고 충분히 말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다. 자기표현은 어린 시절 형성되어야 한다. 부모가 마음껏 표현할 수 있도록 수용하고 안전하게 들어줄 때 세상에 나가 두려움 없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 나 자신이 표현에 대한 답답함을 갖고 있어서 그런지 아이들 키울 때 관심이 많았다. 자녀를 다 키우고 나니 자녀교육에 관심이 줄어든다. 아이들보다 내 삶이 더 중요하다. 내가 잘 살아야 가족이 행복하고 내가 행복해야 모두가 행복하다. 그 말이 사실이다. 자녀보다 중년을 넘어 노년으로 나아가고 있는 나 자신의 자기표현에 더 관심이 간다. 삶의 중년기를 맞아 변환기에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데 자기표현 문제는 굉장히 중요하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말하고 표현해야 한다. 중년은 인생에서 자녀양육과 가정 돌봄의 역할에서 잠시 놓이고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시기이다. 이 시기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노년기가 달라진다. 중년기 정체성 회복 문제는 이후 자녀를 결혼시켜 다음 세대를 돌보는 역할에 영향을 준다. 이 시기는 부부관계의 변화를 필요로 하고 부모님 부양에 관한 문제와 만나는 시기이기도 하다. 자신을 회복하고 자신으로 살아야 할 자신 삶의 과제를 해결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노년의 삶의 달라질 수 있다. 새로운 전환은 자기표현을 통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