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위해 말해야 하는 이유/ 시어머니 사표는 없나요?
은평구에 있는 정신건강 센터에서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구마다 보건소를 다양하게 운영하고 있는 요즘이다. 정신건강 센터에는 50대 후반 60대 연세 드신 분들 참여가 많았다. 참여자들 중 부모님을 돌보는 분들이 여럿 있었다. 자녀를 키우는 스트레스가 일생에서 가장 클 거라 생각하던 난, 부모님 부양 또한 엄청난 스트레스임을 알게 됐다. 자녀 양육은 어느 정도 자발적인 헌신, 모성에 가깝다. 여성들에게 부양에 대한 두려움, 불안감, 스트레스, 수치심 또한 크다. 스트레스 없이 부모를 돌보면서 책임을 다하며 보람을 느끼는 모습도 있지만 무거운 부양의 책임에 매일 힘겨워하는 분들 이야기를 들으며 간접 경험을 했다. 자녀를 키울 때 일찍 일어나라, 음식 가려 먹지 마라, 게임하면 건강에 해롭다는 말을 날마다 하면서 죄책감을 느낀다. 아이를 키울 때 느낀 죄책감을 부모님 부양하면서 똑같이 느낀다. 아이 키워보니 부모님이 자식 키우느라 얼마나 애썼는지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는데 이제 그 사랑과 헌신을 되돌려 주어야 할 시간이라 생각하지만 마음먹는 만큼 되지 않아 속상하고 미안하다. 후회하고 반성하고 다시 잔소리한다. “ 제발 일어나서 운동 좀 하세요. 음식 먹을 때 골고루 챙겨 드시고 약 제때제때 맞춰 드세요.” 부모님 연로하다고 이렇게 힘들고 귀찮아하면 벌 받지 생각하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을 고쳐 먹는다.
“ 아내(엄마)는 가부장제 안에서 윤활유로 소비된다. 제사나 생일 같은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면서 가족 간 관계를 원활하게 한다. 그런데 이 윤활유 역할을 하던 엄마가 병들면 가족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 엄마를 간병하는 짐을 홀로 떠안은 장녀들의 이야기 세편을 묶은 소설집 ‘장녀들’을 번역한 안지나 숙명여대 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가 던진 물음이다. ‘장녀들’ 주인공 맏딸은 전문성 있는 직업도 있고 경제적으로도 독립했는데 어머니의 발병으로 다시 가부장제 안으로 소환된다. 결혼을 하지 않는 덕에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산다고 생각했던 주인공은 어머니를 돌봐야 한다는 요구를 받을 것이라고 예상을 못했다. 이 책은 장녀로서 엄마와 “ 섬뜩한 결합체로서의 모녀관계 ”라고 표현하면서 철이 들락 말락 할 나이부터 자장가 대신 조부모, 남편을 향해 늘어놓은 엄마의 원한을 들으면서 자라고 엄마에게 ‘자식’은 남동생뿐이었는데 어머니 발병으로 ‘독방 간병’을 맡은 거다. 비혼 장녀들의 ‘독방 간병’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비혼 장녀뿐 아니라 누구나 맞닥뜨릴 질문이다. “ 과연 내가 늙으면 누가 나를 돌봐줄 것인가?” 1인 가구가 30%를 넘어서는 지금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화두이다. ‘돌봄 절벽’의 시대에 돌봄을 담당하는 사람이 누구여야 하는가? 장녀이자 딸이 없고 아들 셋인 시댁에서 맏며느리인 나는 이 돌봄 문제에 아주 관심이 많다. 최근에 만난 분 사연을 듣고 이 일이 비단 나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홀로 되신 시어머니는 삶에 의욕을 잃으시고 집에만 계신다. 자주 찾아간다고 반찬을 정성껏 만들어 가면 시어머니는 화를 내신다. 집안은 온통 난장판인데 시어머니는 뭐가 그리 불만인지 찾아와도 타박하시고 뜸하면 노발대발하신다. 혼자되신 다음으로 얼마나 적적하고 외로울까 생각하면 걱정되고 애간장이 탄다. 마치 자신이 홀로 된 것 같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속으로 장남 집에서 같이 살자고 말을 꺼내지 않아서 대놓고 화를 내시는 건가 싶어 맏며느리로 죄책감이 든다. 하지만 한 집에서 사는 건 자신을 죽이고 사는 일과 같다. 그나마 떨어져 사니까 숨 쉬고 사는 거다. 병이라도 나시면 간병할 생각이 두렵다.
‘수치심 권하는 사회(브레네 브라운)’에 나오는 글이다. 아프거나 연로한 부모를 모시는 일은 정신건강 분야에서 가장 스트레스 강도가 높은 것 중 하나다. 여성들은 부모님 부양에 대한 책임, 의무감을 갖고 있다. 부모님 부양에 대한 불안감, 두려움, 스트레스, 수치심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나는 완벽주의라는 악마의 목소리를 듣는다. 머리로는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최선을 다해 돌봐주고 싶다는 이상적인 바람을 갖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너무나 힘겹고 무겁다. 사람들은 종종 부양과 육아를 비교하는 실수를 저지르는데 돌봄이란 의미에서 비슷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부모로부터 돌봄을 받았기 때문에 연로한 부모를 돌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표면상으로 부양과 육아가 비슷해 보이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부양과 육아는 완전히 다르다. 그 둘이 같다는 생각이 죄책감과 수치심을 일으킨다. 우선, 부모나 배우자와의 관계는 자녀와의 관계와 다르다. 자녀를 목욕시킬 때 새 생명이 주는 신비로움으로 행복감을 느낀다. 자녀를 돌볼 때는 생명의 아름다움이 주는 즐거움, 희망을 느끼며 힘이 솟는다. 성인을 돌볼 때는 두려움과 슬픔이 밀려온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죽음을 떠올리게 되고 힘을 빼앗아 간다. 우리 시대의 ‘독방 간병’ ‘돌봄 절벽’ 문제는 이제 어느 특정 가족에 국한되지 않는다. 1인 가구가 늘고 있고 아이를 낳지 않는 추세로 가고 있는 우리나라는 육아와 부양을 더 이상 개인이 해결해야 할 과제로 미룰 수 없다. 육아의 경우에는 조금씩 육아를 지원하는 시스템이 사회에 자라 잡아가고 있는 중이다. 아직 사회적인 시스템 지원으로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확대되고 있다. 문제는 부양 시설과 프로그램이다. 늘어나는 노년층을 위한 부양을 위한 사회적인 시스템 지원이 시급하다. 노년 부양문제는 바로 나의 문제다, “내가 늙으면 누가 나를 돌봐줄 것인가?” 누가 누구를 부양하기 이전에 내가 나로 잘 살기 위해서 병 없는 동안이라도 내 삶의 주인으로 살 수 있으려면 올바른 ‘자기표현’이 필요하다. 자기표현은 내 삶의 선택권을 남에게 넘기지 않고 온전히 나로 살 수 있게 하는 자기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