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죄추정

by 진진

노란 박스테이프는 1000원이면 살 수 있다. 문제는 칼인데, 생각해둔 것이 있지. 사실 박스테이프가 필요한 것도 칼 때문이잖아. 탄소강으로 만든 단단한 칼이면 좋겠다. 고기를 오래 썰어 기름과 단백질이 묻어난 탄소강은 묻어나는 것도 없이 칼이 잘 든다는 걸 유튜브에서 봤거든.


일반 부엌칼은 생각보다 얇고 뾰족하지 않지. 중국집 요리사가 고기를 듬성듬성 썰어내는 칼은 그야말로 작업용이다. 정교한 작업엔 어울리지 않지. 마장동 도축업자들이 살아 있던 소를 부위별로 썰고 기름을 떼내는 칼들을 너무 정교해서 문제라니까.


일식 요리사가 생선 손질할 때 쓰는 칼이야 말로 딱이다. 생선살 정교하게 자르는 사시미칼 말고. 그래. 그거보다 조금 두꺼운 거 말이야. 부엌칼 정도 넓이지만 딱 보면 다르지.


칼등이 단단해 어느정도 단단한 뼈마디도 툭툭 힘을 주면 끊을 수 있지. 끝이 뾰족하니 정확한 지점을 찔러 넣는 것도 훨씬 수월해. 칼이 어느정도 두깨가 있고 단단하면서 뾰족한 게 좋아. 그래야 칼을 찔러 넣고 고기 근육이 경직되면서 칼을 앙 다물지 않는다니까.


칼은 대충 골랐어. 저번에 지나가는 길에 본 시장에 칼 전문점이 있더라고. 요즘에야 뭐든 전문적으로 '프리미엄' 딱지 붙여 하면 잘되잖아. 여긴 프리미엄 칼 전문점이더라구. 거기서 사가면돼.


시나리오를 돌려 보다 막히는 지점이 생겼다. 칼을 어떻게 들고 가지? 칼을 손에 들고 가면 가기도 전에 어디선가 잡히겠지. 가방? 가방은 못 가지고 들어가잖아. 상자에 담아서 가져가면 순발력이 떨어져. 마침 겨울이니 잠바안에 넣어가면 좋겠는데. 안주머니에 넣었다가 괜히 나만 다치는 거 아냐?


그래서 생각한게 박스 테이프였다. 노란테이프로 손잡이를 뺑고 둘둘 갑았다. 뾰족한 칼끝은 살짝. 박스테잎 살짝 감았다고 안 찔리진 않겠지. 한 번 시험 삼아 두툼한 삼겹살이라도 못 찔러본 게 아쉽군.


...


"피고인. 진술 거부 하시는 거죠?"


갑자기 정신을 차린 남자가 소리 나는 쪽을 바라봤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 못 들었습니다. 소리가 잘..."


"테이프를 감은 건 그냥 본인 다치지 않으려고 하신 거 아니냐고요." 우배석 판사가 말했다. 그가 이 사건의 주심이다.


피고인 신문 중 날아온 질문. 예상한 질문이지. 테이프를 감은 칼로 어떻게 사람을 왜 못 죽이겠어.


"아..아닙니다. 위협만 하려고, 조금 다치게 하는 정도만 될 것 같아서요. 제가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테이프를 감으면 죽지는 않을 것 같았는데.."


씨발 정말로 안 줄을 줄이야. 박스 테이프가 그리 질긴 줄은 몰랐다. 칼날에 붙은 박스테이프가 살을 파고드는 걸 막았다니. 범죄학자들도 이런 건 몰랐을 걸. 시발. 그냥 죽여버리고 도망가려고 했더니.


"범행 전 칼을 새로 사셨죠. 범행 하려고 따로 샀죠?"


"아닙니다. 제가 그냥 요리를 좋아해서요. 유튜브 보다가 샀습니다."


...판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피고인을 바라봣다. 무죄추정이라는 건 사실 개소리다. 판사나 검찰이나 다 어떻게 하면 나를 처벌하나 하고 있다. 살인미수냐 특수상해냐. 뭐 한끗차이. 판사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그거다. 나도 법은 좀 알거든. 살인의 의도가 없었다. 그거 아니야.


"죽일 생각은 정말 없었습니다. 왜 죽이겠어요. 그 사람 죽인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월급 몇푼 안 줬다고 설마 사람을 죽이겠어요?"


판사가 계속 쳐다본다. 마음을 읽는 건지 모른다. 마음을 읽으면 뭐해. 법이라는 건 말이다. 증거가 있어야하는 거야. 변호사 새끼는 참 하는 거 없네. 뭔 말이라도 한 마디해야지 국선이라고 시계만 보고 말이야.


"더 하실 말씀 없으면 이만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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