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딜 들어가도 맛집인 광주에서 늦은 저녁식사를 마치고 여유 있게 출발한 탓도 있지만 휴게소에 들러 핫도그와 맥반석 오징어를 간식거리로 먹으면서 쉬엄쉬엄 움직이다 보니 어느덧 해가 지고 짙은 어둠이 주위를 감쌌다.
조수석에 앉은 아내는 짧은 여행 기간 동안 찍은 풍경 사진, 맛있는 음식 사진을 다시 보면서 미소를 짓다가 피곤했는지 고개를 옆으로 떨구고 잠에 빠졌다. 천안 논산 고속도로를 거쳐 경부고속도로를 지나 거의 집에 도착할 때였다.
“우와~ 111111” 아내가 다급하게 외쳤다.
“응? 뭐라고? 왜 그래?” 고요한 적막을 깨는 아내의 외침에 깜짝 놀라 물었다.
“숫자 1이 여섯 번이나 들어갔어. 봐봐.”
계기판 옆 내비게이션 화면을 보니 전자시계는 11시 11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게다가 외부 온도까지 11도. 숫자 1이 여섯 번, 11이 세 번이나 겹쳤다. 11시 11분은 오전이고 오후고 가끔 눈에 띄었지만 바깥 온도까지 11도를 나타내며 숫자 1이 나란히 줄 서 있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연이은 숫자 11이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우리를 환영해준 것만 같았다.
아내는 특별히 좋아하는 숫자는 없다고는 하지만 '1'과 가장 잘 어울린다. 아내의 추진력과 리더십이 가장 앞서 있는 숫자 '1'을 떠올리게 한다. 함께 거리를 걷거나 산책을 나가면 나보다 네, 다섯 걸음은 앞서서 걷는 아내다. 나는 숫자 '3'을 좋아한다. '3'은 삼각형을 생각나게 해 안정감을 준다. 두 꼭짓점이 다른 한 꼭짓점을 받쳐준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야구를 할 때면 난 항상 3번 타자가 되고 싶었다.
한국 사람들은 짝수보다 홀수를 좋아한다. 1 내지는 3, 5, 7과 같다. 특히 숫자 7은 '러키세븐'이라 하여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이들의 애정을 받는 대표적인 숫자다. 반면 숫자 4는 '죽을 사(死)'와 음이 같아 피하는 숫자다. 최근에는 많이 사라졌지만 특정 건물에 4층을 없애고 3층 다음 바로 5층으로 표기하거나 4 대신 알파벳 F를 쓰기도 한다. 아파트나 호텔에서는 4호실을 아예 지워버리는 경우도 있다. 중국 사람들은 숫자 8을 좋아한다. 숫자 8의 '八(ba)' 발음이 '큰돈을 벌다'는 의미인 '发财(facai)'의 '发(fa)'와 닮아서다. 중국 베이징 올림픽이 2008년 8월 8일 저녁 8시에 개막한 것을 보더라도 중국 사람들이 얼마나 숫자 8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 아름다운 여덟 군데의 경치를 뜻하는 팔경(八景)과 젊은 나이의 상징인 이팔청춘(二八靑春), 여러 방면의 일에 능통한 사람의 팔방미인(八方美人), 사방으로 통하는 사통팔달(四通八達) 등은 중국인이 선호하는 숫자 8과 연관돼 있으리라.
점심식사 후 나른한 오후 시간, 졸린 눈을 비비며 업무에 몰입하던 중 퇴근 시간이 다가왔거니 하고 시계를 봤을 때 4시 44분으로 나와 놀란 적이 있다. 퇴근 시간까지 1시간 이상 남았다는 믿기지 않는 현실과 숫자 4가 세 번 연속 보인다는 점 때문이다. 4자가 많이 보이면 께름칙한 기분은 어쩔 수 없다. 6이 연달아 세 번 들어가는 '666'도 뭔가 찜찜하다. 영화를 많이 봐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럼에도 13일이 금요일이라면 더욱 개운치 않다. 과학적 근거 없는 미신이지만 마음이 동요한다. 13일의 금요일, 오후 4시 44분 44초가 된다면 눈을 찔끔 감고 '안 본 눈 삽니다'를 외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 숫자의 연속성은 기대감을 갖게 만든다. 시침의 숫자와 분침의 숫자가 같은 것은 그 시간대에 단 한 번뿐이기 때문에 무언가에 당첨된 듯 흥분된다. 나는 알람을 설정할 때도 정각에 맞춰놓지 않는다. 보통은 7시 7분에 맞춰놓고 조금 일찍 일어나야 할 때면 6시 6분으로 정한다. 주말은 8시 8분이다. 같은 숫자가 반복되면 왠지 그 날 하루가 잘 풀릴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다.
숫자는 어떠한 문자보다도 친밀하고 익숙하다. 태어나는 순간 생년월일과 주민등록번호는 인생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가장 친한 숫자가 된다. 학교에 들어가면 학년, 반, 번호를 책과 공책에 정성껏 적는다. 학번과 군번은 지금도 외운다. 휴대폰 번호와 은행 계좌번호, 비밀번호, 차량번호, 집 주소의 번지수, 알코올 도수까지 우리 주위에는 다양한 숫자들로 가득하다. 좋아하는 숫자가 포함되어 있으면 행운의 쾌재를 부르기도 한다. 자신만의 의미가 있는 숫자 조합으로 특정 번호를 완성시키기도 한다.
세 번 연달아 나열된 숫자 11 그리고 아내와 함께 광주 여행을 다녀온 지도 어느덧 3년이 지났다. 숫자 11을 추억하며 11월 11일 즈음하여 단풍구경을 다녀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