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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크나인 Dec 09. 2020

지압 슬리퍼의 아픔을 견딜만할 때

아픔을 넘어선 그 무언가를 위하여

“좀 아프지만 신을만할 거야~”


어느 날 아내가 지압 슬리퍼를 내게 건넸다.


지압 슬리퍼의 실물을 처음 접한 순간, 40대 이상의 아재들만 신을 것 같은 겉모습에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아, 나도 40대지...'라는 한숨 섞인 생각이 들며 지압 슬리퍼를 받아 내 자리에 뒀다. 


자세히 보니 발바닥이 맞닿는 부분에 지압돌이 무지막지하게 박혀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동글동글 귀엽게 생긴 모습과는 달리 '어서 와~ 지압 슬리퍼는 처음이지? 고통을 느끼게 해 줄게~'라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선뜻 신어볼 마음이 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호기심에 지압 슬리퍼에 두 발을 맡겨보았다. 의자에 앉아 지압 슬리퍼를 신어서 그런지 발바닥을 콩콩 누르는 듯한 가벼운 느낌뿐이라 통증도 없어 발을 빼지 않고 그대로 지압 슬리퍼 안에 두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것저것 열심히 하다가 갈증을 느낀 나는 시원한 물 한잔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아무 생각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윽~!!”

나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이 나왔다. 그리곤 다시 엉덩이를 의자에 붙일 수밖에 없었다. 지압 슬리퍼의 돌들이 발바닥의 온 신경을 자극했다. '이런 걸 왜 신지?'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는 지압 슬리퍼를 벗어 한쪽 구석으로 몰아두고 운동화로 갈아 신었다.


다음날 아침.

밤잠을 뒤척여 살짝 부은 눈을 깨우고자 마른세수를 한 뒤 컴퓨터 전원을 켰다. 의자에 털썩 앉아 앞으로 끌어당기다가 발 받침대 옆에 있는 지압 슬리퍼와 눈이 마주쳤다. 지압돌들이 위세 좋게 나를 쳐다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전날의 치욕스러운 패배가 떠올랐다. 묘한 승부욕이 생겼다. 이번에는 지압 슬리퍼와의 기싸움에서 밀리고 싶지 않았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지압 슬리퍼에 발을 집어넣었다. 호흡을 길게 한번 내뱉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 정도의 통증을 예상해서인지 전날처럼 갑작스러운 자극이 발바닥에 전해지지 않았다. '신을 만 한걸?' 한 두 걸음씩 움직여봐도 참을만했다. 지압 슬리퍼를 제압했다는 통쾌함에 왼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다음 날도 또 다음날도 사무실에 오면 지압 슬리퍼를 제일 먼저 신었다. 지압 슬리퍼와 한 몸이 되어 이곳저곳을 누비며 왕성한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잠깐의 아픔을 견디면 안락함이 찾아오는 것을 느꼈다. 의자에 앉아서도 지압돌에 발바닥을 살살 문지르면 발바닥 정중앙과 움푹 파인 부분에 특히 많은 자극이 와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무언가 알싸한 쾌감이 발바닥을 타고 머리까지 올라와 시원함을 전달해주는 기분이었다. 


공원에 가면 분수대 옆쪽으로 지압과 함께 맨발 걷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이 길게 만들어져 있다. 몇 년 전 한번 시도했다가 '어이쿠' 소리를 내며 급하게 신발을 찾아 신었던 기억이 있는 나로서는 괄목할만한 성장이었다. 당뇨병으로 고생하던 세종대왕이 버선 속에 콩을 넣고 다니며 발바닥을 자극했다는 것이 괜히 한 행동은 아니었으리라.


어린 시절의 아버지도 생각났다. 아버지는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등을 밟아달라고 하셨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온 아버지는 저녁 식사하기 전에 아랫목에 배를 깔고 엎드린 뒤 나를 쳐다보셨다. 등을 꾹꾹 밟아드리면 아버지는 '아이고', '아이고'라는 말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지만 언제나 시원하다고 하셨다. 내 키와 몸무게가 자라고 덩치가 커질수록 아버지의 등은 더욱 왜소하게 느껴졌고 두 발 대신 한 발로 등을 밟아드렸다.


아픔을 견디고 이겨내면 즐거움이 번지고 변화가 찾아온다. 몸도 마음도 인생도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힘들고 괴롭고 아프다고 멀리할 것인지, 아픔을 넘어서기 위해 힘찬 발걸음을 내디딜지 선택해 움직여야 한다. 


아프지만 그 아픔을 넘어선 자극이 필요할 때. 어린 시절 등을 밟아달라는 아버지가 이해될 때. 지압 슬리퍼의 아픔을 견딜만할 때.


나는 지금 그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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