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나는 겁이 참 많았다.
사실 당시에는 내가 겁이 많다는 것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했다. 설사 알았다 하더라도 인정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돌아보면 걱정과 근심이라는 감정이 이성보다 앞서면서 눈물로 표현된 것 같다.
해가 지고 밤이 깊어가도 부모님이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나는 집 밖으로 나와 대성통곡을 했다. 혹시 무슨 사고라도 당한 것은 아닌지, 동생과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 때문이었다. 그러면 3살 터울의 남동생은 내 어깨를 토닥거리며 “괜찮아, 금방 오실 거야. 울지 마. 형”하고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나를 위로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녀석이 말이다. 동네가 떠나갈 듯한 내 울음소리에 주변 어른들도 나를 달랬다. 부모님이 집으로 들어오는 인기척이 들리면 하염없이 흐르던 눈물의 수도꼭지는 그제야 서서히 잠기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높은 곳을 몸서리치게 싫어했다. 어렸을 적에는 높은 곳에 올라갈 일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 잘 느끼지 못했지만 커 나갈수록 높은 곳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신기한 것은 마냥 높다고 무서운 게 아니라는 거다. 고소공포증의 사전적 의미는 높은 곳에 올라가면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는 공포증이라는데 내가 느끼는 공포는 그때그때 다르다.
높은 곳에 있어도 의지할 만한 난간이나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두려움이 덜하다. 참을 수 있다. 첫 비행기를 탈 때는 구레나룻 사이로 땀이 나면서 두려웠지만 타다 보니 탈만 했다. 비행기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눈동자만 밖을 주시하지 않으면 내가 얼마나 높은 곳에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견딜만했다.
그래도 웬만하면 높은 곳에 머문다든지 높은 곳에서 밑으로 떨어지는 놀이기구나 스포츠는 영 자신이 없다. 탈 마음도 없다. 가끔 5층 집 거실에서 창밖을 보다가도 먼 산이 아닌 단지 내 놀이터가 보이는 창문 아래로 시선을 옮기면 무릎 뒤쪽이 찌릿찌릿해지는 것을 느끼곤 한다.
최근 들어 가장 무서웠던 순간은 일산의 스타필드에 있는 스포츠 몬스터를 방문했을 때였다. 활동적인 성향의 아내는 어른들도 마음껏 다양한 스포츠를 접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시동을 걸었다. 공놀이를 좋아하는 나는 야구 타격과 축구 페널티킥을 차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아내는 사격과 양궁, 다트에 흥미를 보였다.
또 뭘 할까~ 하며 여기저기 살펴보던 중 아이들이 똑같은 옷을 입고 나란히 앉아있는 곳이 보였다. 파라볼릭 슬라이드(Parabolic Slide)라는 85도의 경사에서 떨어지는 기구였다. 눈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높아 보이지 않아 상위 단계를 선택했다. (아마 4m 정도 높이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내도 같은 레벨을 택했다. 초등학생처럼 보이는 아이들도 잘 타고 내려왔다. 몇몇 무서워하며 고함을 지르는 학생들도 있었다. 나는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 드디어 우리의 차례. 아내는 먼저 타겠다고 했다. 슬라이드의 윗부분으로 향하는 줄이 달린 바를 잡고 아내는 바닥에 누웠다. 관리자의 신호와 함께 줄은 천천히 위로 올라갔고 더욱 높이 높이 올라갔다. 정해진 높이로 올라간 아내는 바를 놓고 미끄러져 내려왔다. 내려오면 안전한 볼풀이 기다리고 있다.
내 차례다. 아내보다 더 멋진 폼으로 내려오겠다는 생각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바를 움켜쥐고 자세를 잡으니 줄이 서서히 위를 향했다. 등이 슬라이드를 타고 점점 위로 올라갔다. 4m 높이에 올라가자 이런, 너무 무서웠다. 관리자는 바에 손을 놓고 미끄러져 내려오라고 소리쳤다. 떨렸다. 쉽게 손을 놓지 못했다.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많은 아이들의 얼굴이 보였고 아내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긴장됐지만 여유롭게 보이려 “내려갈까요?”, “내려가도 되나요?”를 재차 물었다. “내려오세요” 관리자는 다시 말했다. 누군가 나를 밀어버린다거나 알아서 나를 밑으로 내려주면 무서움을 꾹 참고 내려갈 텐데, 이건 내가 스스로 바를 놓아야 내려갈 수 있다. 그런데 바를 꽉 움켜쥔 내 손이 도저히 펴지지 않았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예 점프를 뛰어 개구리 자세가 되어서라도 내려가고 싶었다. 슬라이드에 미끄러져 내려오는 것이 두려웠다. 얼마 동안 매달려 있었을까. 팔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이때 공포보다 창피함이 고개를 내밀었다. '설마 죽을까...' 하는 마음에 손을 놔버렸다. “윽...” 내려오는 시간은 2~3초나 될까? 볼풀에 몸이 잠겼다. 창피한 마음에 나오기가 싫었다. “오빠, 빨리 나와, 가자” 아내의 외침에 겨우 일어나 잘 미끄러지기 위해 입은 옷을 벗고 현장을 빠져나왔다. 눈치로 느끼기에 아무도 신경을 안 쓰는 듯했다.
또 한 번의 위기는 전남 곡성군에 위치한 섬진강 기차마을에 갔을 때다. 아내와 늦가을에 찾았지만 추적추적 조금씩 가을비가 내려 사람이 많지 않았다. 증기기관차를 타고 싶었으나 2시간을 기다려야 한다기에 날씨도 쌀쌀하고 해서 다음을 기약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가까운 거리에 놀이기구가 보여 그곳으로 이동했다. 회전목마나 작은 바이킹이 눈에 띄었다. 대관람차도 보였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나와 상관없는 놀이기구라는 생각에서다.
그때였다. 아내가 내 손을 잡고 끌면서 말했다.
“우리 저거 타보자~ 대관람차”
“응???”
나는 아내 손에 끌려가며 귀를 의심했다. 높이도 높을뿐더러 그렇게 안전해 보이지도 않고 타는 사람도 없고 비도 오는 지금 시점에서 저걸 타자고? 나는 속으로 외쳤지만 겉으로는 “그럴까?”하고 화답했다. “나도 대관람차 처음 타는데 재미있을 것 같아~” 아내도 대관람차는 처음 탄다고 했다. 표를 끊고 관리자의 안내에 따라 대관람차에 올랐다. 진짜 우리 둘만 탔다. 다른 4인 가족이 있었는데 눈에 보이지 않았다.
마주 앉은 우리는 창밖을 응시했다. 기찻길의 양 옆으로 광활한 평야가 가슴을 트이게 만들었다. 중반 정도 올라가면서부터 나는 더 먼 곳을 바라보았다. 꼭대기 반환점을 찍었을 때는 나도 모르게 아내의 손을 잡았다. 아내는 웃으며 잡은 손을 토닥였다. 헛기침을 한번 하고 시선을 끌어모아 아래를 쳐다봤다. 관리자가 손톱만 하게 보였다. 까마득했다. 큰 숨을 한번 쉬고 다시 먼 곳을 향했다. 빨리 돌아 내려가기를 바랐다. 점차 지상과 가까워지자 마음이 놓였다. 땅이 이렇게 포근한 존재였나. 대관람차에서 내려 땅을 밟으니 안심이 됐다. 생애 첫 대관람차를 탔다는 뿌듯함에 괜스레 자랑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곡성 여행을 마치고 올라오는 길에 아내는 말했다.
“오빠, 우리 나중에 패러글라이딩 한번 타보자. 나 그거 너무 해보고 싶어”
두려운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억지웃음을 지어 보인 뒤 “그럴까?”라고 답했다. 곤란한 질문에 정확한 답을 하지 않고 되묻는 나의 버릇이 순간을 모면하게 했다.
그래도 아내와 함께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첫 대관람차를 무탈하게 완수한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