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리면 어린아이처럼 함박웃음을 짓고 눈 구경에 여념이 없다. 이번 겨울은 아직 본격적인 눈 구경을 못했다. 수도권에 눈이 내렸을 때 지방에 있었고 지방에 눈이 쏟아질 때 수도권에 있어 타이밍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날 당일치기 지방 출장을 간 아내를 픽업하기 위해 SRT수서역으로 갔다. 오후 5시 30분 도착 시간에 맞춰 여유 있게 주차한 뒤 아내를 만났다. 저녁 식사를 해결하고 들어가자는 아내의 의견에 메뉴를 고르던 중 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지난달 생일 기념 쿠폰을 보내준 것이 떠올라 그곳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직원은 창가 자리를 권했다. 종종 이 곳을 들러 식사를 했지만 창가 자리에 앉은 것은 처음이었다. 내부 넓은 공간에 식사 중인 손님으로 찬 테이블은 3개뿐이었다. 고요한 적막함에 코로나19를 원망해본다. 그렇게 한창 식사를 하던 중 아내가 한껏 올라온 톤으로 외쳤다.
“눈이다!!!눈~~”
창밖을 보니 하얀 솜털 같은 눈이 하늘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에 우리는 마주 보고 크게 웃었다. 우리 부부의 오랜만의 외식을 하늘의 누군가가 열렬히 환영하는 듯 눈은 그렇게 아내와 내 주위를 감쌌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포근한 눈을 향한 우리의 시선은 식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고 장갑을 낀 채 테라스로 나간 아내와 나는 펑펑 내리는 눈을 마음껏 만끽했다. 눈덩이를 굴려 작은 눈사람도 만들었다. 반려견 설이는 처음에는 낯설어했지만 이내 꼬리를 흔들며 하얀 눈을 반겼다. 아내와 함께 맞이한 눈은 나이를 잊게 해 주었다. 잠시나마 세상 시름도 잊게 해 주었다. 신나게 눈과 하나가 되어 즐긴 우리는 체력의 한계(?)를 실감하며 집으로 들어왔다.
시린 손을 '호~호~' 불며 집으로 들어온 뒤에는 '내일 아침 차가 많이 막히고 사고도 좀 나겠는데...'라는 현실적인 걱정이 떠나지를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걱정은 단지 걱정일 뿐, 사고의 당사자가 되리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오늘 아침, 아내와 함께 출근길에 나섰다. 역시나 도로는 지난밤 내린 눈으로 덮여 있었다. 온 세상이 하얬다. 판교에서 동탄으로 가는 길은 녹록지 않았다. 좁은 길을 지나 용인-서울 고속도로를 이용하기 위해 서판교 IC로 진입하려는 찰나에 경찰이 앞을 막았다. 도로가 미끄러워 다른 길을 이용하라는 뜻이었다.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를 통해 갈까도 생각했지만 큰길을 이용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판단해 경부고속도로로 가기로 했다. 전체적으로 다른 차들도 서행했지만 막히지는 않았다. 기흥동탄 IC를 통과해 무사히 사무실로 향했다. 지방도로는 고속도로와는 달리 더욱 거북이걸음을 했지만 안전하게 도착하는 것이 중요했다.
드디어 사무실 건물의 주차장 입구.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내비게이션 종료 버튼을 누르고 차단기를 통과했다. 서서히 지하주차장으로 진입했는데 내리막이 심해서인지 미끄러운 지면은 우리 차의 브레이크를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렸다. 지하주차장으로 가기 위해서는 내리막을 거쳐 바로 좌회전을 해야 한다. 내리막 끝에는 다른 사무실이 들어와 있다.
꾹, 꾹 브레이크 페달을 밟은 오른쪽 발바닥에 불편한 느낌을 받으며 오만가지 생각을 했다. '차선을 바꿀까?', '미끄러운 내리막이 끝나면 평지에서 바로 왼쪽으로 틀면 괜찮겠지' 등등.
내리막길이 끝나고 평평한 길에 다다렀는데도 노면의 미끄러움은 그대로였다. 결국 차는 중력을 거스르는 느낌을 받으며 미끄러져 벽면을 그대로 치고 말았다. 아찔했다. 순간 우리는 얼어붙었고 차에서 내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괜찮아?” 아내와 나는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다친 사람은 없었고 다른 차를 치지도 않았다. 내려서 차를 확인해보니 오른쪽 앞 범퍼가 파손됐다. 받힌 벽 쪽의 사무실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나왔다. “아니, 아까도 다른 차가 한번 사고 났었는데...” 그 남자가 말끝을 흐렸다.
지하주차장 초입의 가파르고 긴 내리막길을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건물 관리사무소에 가서 사고 소식을 알렸다. 관계자들은 그때서야 나와 주차장 바닥의 눌어붙은 눈을 넉가래로 밀었다. 급한 대로 박스를 깔아놓든지 염화칼슘을 뿌리든지 지하주차장 출입을 통제하든지 조치를 미리 취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관계자에게 말했지만 그는 박스를 깔면 더 미끄럽다며 그리고 차가 왔다 갔다 하는데 그럴 수 없었다는 핑계를 댔다.
그때 이전 사고의 남자가 나타나 주차장 관리에 대해 건물 관계자에게 강하게 따져 물었다. 그냥 넘어가서는 안된다며 말이다. 그 남자가 건물 관계자와 이야기를 나누길래 우리는 더 이상 컴플레인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보험회사에 연락을 했고 다른 사고가 많았는지 도착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단독 사고라서 사고 현장을 벗어나 이동 주차를 권했고 대차에 대해서도 알려줬다.
사고 현장에서 차를 이동시키기 위해 차를 뺀 뒤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보통 지하 2층에 주차를 하는데 그러기에는 다시 내리막길을 가야 했기 때문에 지하 1층의 벽면 쪽에 차를 댔다. 두려웠다. 트라우마를 실감했다. 브레이크가 없는 듯 속도가 붙으며 내리막길을 내려와 벽을 들이박은 좀 전의 기억이 다시 떠올라 머리를 좌우로 여러 번 흔들었다. 단독 사고도 이러한데 인사 사고나 더 큰 사고의 당사자나 피해자의 트라우마는 어떨지 감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사무실에 올라온 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달달하면서 따뜻한 커피를 한잔씩 했다. 그때 천장의 스피커를 통해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지하주차장 초입의 미끄러운 노면과 3건의 사고 발생으로 인해 입구를 차단한다는 내용이었다. 우리 이후 한 건의 사고가 더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이런 상황을 예측할 수는 없었겠지만 3마리의 소를 잃고 나서야 외양간을 고친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다는 안도감 때문에 발생하는 사고도 있다. 물론 완전히 마음을 내려놓은 것은 아니었지만 정말 천천히 지하주차장에 진입했다면 이번 사고는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도 남는다.
이번 일로 인해 언제 어디서든 누구라도 사고와 직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더욱이 눈길과 빗길은 안전을 최우선으로 언제나 조심해야 한다는 교훈을 가슴속에 새기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