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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틀콜드 Mar 06. 2022

저는 할머니에게 금융사기를 시도한 손자입니다

그것도, 15년을 함께 산 할머니에게

이 글이 평소 '잘해야지'하며 생각만 하는 분에게, 그 생각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게 도와줄 겁니다.









때는 2022년, 1월의 어느 날.


서울의 한 은행에서,


나는 천한의 몹쓸 놈이 되었다.


그래, 왠지 그날은 유난히 춥더라니.



"할머니, 그럼 내일 나랑 같이 가셔"


할머니가 꽤 예전에 만든 통장을 분실한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내가 시간이 되는 날, 통장을 같이, 다시 만들러 가자고 얘기했다.


옷을 챙겨 입고 나왔는데 예상한 것보다 날씨가 매우 추웠다.


다행히도 할머니는 패딩에 장갑에 목도리에 완전 무장을 했다.



은행에 도착하고 번호표를 뽑고 우리의 순서를 기다렸다.


'띵동- n번 고객님, n번 창구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평일이고,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시간대라 우리의 순서가 빨리 찾아왔다.


"무슨 업무 때문에 오셨어요?"


/"네 저희 할머니가 통장을 분실하셔서, 새로 만드려고요"


"아 네. 신분증 주시겠어요?"


창구 바로 뒤 의자에 앉아, 유모차에 손을 걸치고 있는 할머니에게 신분증을 건네받았다.


서류를 작성하던 중, 은행 담당자가 서명은 본인이 해야 한다며 할머니 좀 불러달라고 했다.


"할머니, 이거 서명 할머니가 해야 된데요"


아구아구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할머니는 내 옆으로 와서 전자펜을 들며 말했다.


"제가요. 파큰슨(=파킨슨) 때문에 손이 떨려서 잘 쓰질 못해요"


은행 담당자는 할머니의 말에 웃음으로 답했다.



그 이후에도 할머니는 몇 번의 '떨리는' 서명 작업을 거쳤다.


그러다 몇 달 전, 할머니가 내 고모와 와서 인터넷뱅킹을 해지한 사실을 알게 됐다.


"할머니, 이거 그때 왜 해지했어?"


/"그게 뭔데?"


"아니 이거, 내가 작년에 할머니, 여기까지 걸어와야 되고,

또 나 없으면 못 가고 하니까 집에서 내가 조회할 수 있게 했었잖아"


/"나는 그거 뭐 돈 나가는 건 줄 알고 고모랑 와서 그냥 안 한다고 했지"


할머니 말을 듣고, 나는 은행 직원분에게 다시 인터넷 뱅킹 가입을 요청했다.


가입 서류를 작성하던 중, 은행 직원이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님, 지금 하시는 인터넷 뱅킹 신청하실 거예요?"


/"인터네 뱅키? 그게 뭔데요?"


"인터넷으로 돈도 출금하고, 입금하고, 조회도 할 수 있는 거예요.

전에 신청하셨던 거요. 이게 본인 의사가 필요해서요"


할머니의 이해를 돕고자, 내가 이중언어를 쉽게 해석해 할머니에게 전했다.


"그러니까 할머니, 전에 신청했던 거,

할머니 여기 안 와도, 내가 집에서 얼마 있는지 확인해주고 하는 거야"


/"에이. 거기 돈이 얼마나 있다고. 누가 가져가지도 않아"


"아니 할머니, 가져가는 걸 떠나서 이게 있으면 나중에 할머니가 편하다니까.

할머니도 편하고 나도 편한 거야"


내 말에 할머니는 은행 직원에게 못 이기는 척, 한다고 말했다.


이윽고, 통장 개설이 완료될 때쯤, 할머니의 서명이 한 번 더 필요하다고 은행 직원이 말했다.


"할머니, 마지막으로 여기 서명 한 번만 해주세요"


자, 이제 이 '서명 한 번'이면, 오늘 우리가 이 은행에 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거다.


그런데...


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바로 전, 할머니가 말했다.


"아니 이거 무슨 이런 걸 많이 해? 이거 돈 빼가려는 거 아니야?"


/"응?"


나는 당황해서 할머니에게 되물었다.


할머니는 내 말에 대꾸도 않고, 은행 직원에게 말했다.



"요즘 도둑놈이 많데요"


저 말에 은행 직원이며, 은행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봤다. 심지어, 저어기 멀리 있던 해당 은행의 대빵 마저.

(글 쓰며 이 순간을 다시 회상하니, 그때 이런 생각이 스쳤었다. '이거 이러다 직원 중 누군가가 그거 누르는 거 아니야?' 은행 범죄 영화에서 용의자들이 은행을 털 때, 직원이 책상 아래에 붙은 그 긴급 벨 말이다)



나는 할머니의 너무 당황스럽고 답답해서 "참"하고 헛웃음을 쳤고, 이내 말을 이었다.


"도둑놈도 부잣집을 털지 원.."


그 사이 할머니는 서명을 했고, 은행 직원이 말했다.


"네. 여기 통장 재발급하신 거 나왔어요~"


할머니는 통장을 보더니 말했다.


"아 이게 성남 그 통장이구나"


나는 할머니의 저 말에 바로 "그래~~!"라며 말했고,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참, 누가 보면 손자가 할머니 돈 빼가려는지 알겠네(웃음)"


나의 농담(대처)에 직원들의 얼굴에 웃음이 띄었다.


이후 할머니는 '자기는 몰랐다'라고 시치미(?)를 뗐고, 우리는 그렇게 훈훈하게 은행 밖을 나갔다.


다시 추운 밖에서 길을 가며 할머니에게 말했다.


"할머니, 이거 하러 온 건데 왜 자꾸 딴소리를 하셔"


/"아니~ 상관없어"


"상관없긴(웃음). 거기 직원들이 다 쳐다보더만. 그래서 본인 의사 물어본 거잖아"


내 말에 할머니는 괜찮다 괜찮다 하며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게 유모차를 드르르륵 밀며 걸어갔다.


그래, 지금은 괜찮다. 그때는, 아니 그날은 끝까지 마음이 불편하면서 괜찮지 않았는데 말이다.



불안한 누군가를, 편히 잡아주는 노인의 지혜라 여기련다.



금융사기를 시도한 손자가 될 뻔한

작가 리틀콜드 씀




은행 일 이후, 근처 시장에 들러 장을 보고 가는 나와 할매.jpg






"이봐, 젊은이" 그 이후, 할머니 둘과 살며 관찰하고, 돌보며, 쓰는 글 중, '돌봄'에 관련한 글입니다. 글을 통해 보다 가깝고, 가장 소중한 주변에 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 관련 매거진 연재 중(아래)

https://brunch.co.kr/magazine/2ba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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