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슴도치의 꿈

시스템 안에서의 20여년

by 김정민

같은 회사에서 20년 넘게 일했다는 말에, 사람들은 흔히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단하시네요”, “한 우물을 파셨군요” 같은 말을 건넨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것을 ‘성취’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그저, 버텼을 뿐이다. 회사는 매일 나에게, 어제의 수고는 잊고 처음부터 다시 ‘유능한 사람’이 되라고 요구했다. 계속해서 나를 증명해야 한다는 부담과 두려움. 나 자신에 대한 불신, 무력감. 그 과정에서 생긴 불안과 우울. “이 일은 나와 맞지 않아”라는 내면의 목소리도,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술자리에서 내가 글을 쓰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배가 ‘다행’이라고 말했다. 회사에선 무기력해 보였다는 뜻이었다. 마음이 아팠지만, 나 역시 알고 있었다. 회사라는 무대에서 나는 점점 퇴장하고 있었다는 걸. 처음부터 내가 이곳에 맞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만, 회사는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 돌이켜보면 지난 20년의 나는, 온기를 갈망하면서도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와 같았다. 동료들에게 다가가고 싶었지만 난 사회생활에 서툴렀다.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단정한 공간에서 나는 그 태도를 숨기지 못했다. 평가와 경쟁에서 의연한 척 그들의 열정을 내심 무시하기도 했다. 아무도 상처주지 않고 누구에게도 상처받지 않으려했지만, 결국 나는 외로운 섬이 되었다. 업무에 열정을 불태우는 이들과 같은 공간에서 의지 없이 보조를 맞추는 것도 쉬운일은 아니었고, 어느덧 후배들의 앞에 무기력한 선배로 서있는 것도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다.


몇 년 전부터 열 댓 명 남짓의 파트원을 책임지는 말단 리더가 된 나는 결정하고 조율하고 책임을 감당하는 일들을 맡기 시작했다. 업무보다 더 버거운 건 사람 사이의 긴장이었다. 별다른 의지가 없던 공간에서 누군가를 이끌어 나아가는 일은 그 자체로 모순이었다. 그렇게 리더로서 역할을 하고 인정을 받고자 하면 할 수록 무력감과 두려움이 찾아왔다. 내가 극복할 수 없는 파고의 연속이 이어지고 난 질식해버리고 말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말이 지나고 출근을 앞 둔 밤이면 종종 잠을 이루지 못했고, 결국 상담과 약을 병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 상담실에서 상담사님은 내게 이제 상담을 그만둘 시기를 스스로 정해보라고 했다. 불안함과 함께, 이상하게도 서운함이 먼저 올라왔다. 힘들 때 붙잡았던 마지막 끈을 놓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말은 작별이 아니라 ‘이제는 스스로 회복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의 표현이었고, 이제는 내 안의 목소리를 따라 나를 증명해 보라는 의미였다. 나는 이제, ‘버텨온 나’에서 ‘보여줄 나’로 옮겨가려 한다. 무기력해 보였던 나, 시스템 안에서 조용히 사라지던 나, 세상의 리듬에 맞추기 위해 스스로를 잘라내던 나. 그 모든 과거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끌어안은 채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 내가 살아낸 시간 속에도, 분명히 나만의 숨결과 흔적이 있었으니까.


이제는 그 시간들을 글로 불러내고 싶다. 한때는 삼켰던 문장들을, 감히 꺼내지 못했던 기억과 감정을, 내 언어로 다시 일으켜보고 싶다. 지금 나에게 글은 나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내 안에서 말하지 못한 것들이 글을 통해 비로소 언어가 되고, 그 언어는 다시 나를 발견하게 한다. 나는 버텨온 나를 미워하지도, 스스로를 위로하려 애쓰지도 않는다. 그 시간은 나를 지켜낸 증거다. 도망치지 않기 위해 손끝으로 움켜쥐었던 날들 사이에서 나는 내가 무너지는 걸 막아냈다. 그렇게 버텨낸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여기 있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 시간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그 위에 나를 다시 세우고 싶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움켜쥐었던 나를 지나, 이제는 말하고, 표현하고, 드러내는 나로. 표현은 위험을 동반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의 맨 살을 보여주는 순간, 다른 이의 가시로 상처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럼에도 멈추지 않으려 한다. 남은 시간을, ‘견디는 나’가 아니라 ‘표현하는 나’로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