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인간의 습작들

불안과 우울의 흔적들

by 김정민

한동안 아이패드로 그린 그림들을 인스타그램에 올린 적이 있었다. 전문적으로 배운 적은 없었기에, 거의 습작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찾아온 사람들이 테크닉보다 아이디어를 봐준다면 어떨까 기대했는데, 결과만 얘기하자면, 찾아오는 사람도 ‘좋아요’를 눌러준 사람도 거의 없었다. SNS를 통해 쉽게 접속하고 공유될 수 있는 세상에서 나의 가치는 이 정도 밖에 안되는가 생각하고 씁쓸해졌다. 그림은 전공도 아니고 생업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취미라고 하기엔 내가 부여한 의미가 좀 컸던 것 같다. 창의력을 쏟을 만한 일이 내 업무에도, 일상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SNS 포스팅은 중단했지만, 역설적으로 나는 자유로워졌다. 타인의 인정을 받겠다는 마음을 내려놓는 순간, 오직 나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행위가 되었다. 남들이 정하는 가치의 경계 밖에서, 나만의 의미를 만드는 일. 그것이야말로 '잉여인간'이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그림들은 내가 가장 어두웠던 시간을 통과하는 과정의 기록으로 남았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낙서나 만화 정도였다. 내가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몇 해 전 찾아온 불면 때문이었다. 불안과 우울 진단을 받고 상담을 받는 과정에서 "좋아하고 열중할 무언가를 해보라"는 권유를 들었고, 나는 그림을 떠올렸다. 무언가를 보고 비슷하게 그리는 그림은 곧잘 그릴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 나에게 즐거움을 주지는 못했다. 의미를 드러내고 전달하는 과정 - 손재주에 대한 자기 만족이 아니라, 나를 들여다보고 그 마음을 그대로 옮기는 일이 필요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들, 싸우고 있는 것들, 그 과정에서 쉽게 지치고 상처받으며 곤두서 있는 나를 표현하고 싶었다.


회사에서는 몇 년째 파트장을 맡고 있었고, 그 시간들은 나에게 버거웠다. 내가 애를 쓸 수록 사람들은 나를 비웃는 것만 같았고, 머지않아 내 초라한 정체가 드러날 것 같았다. 벗어나고 싶었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좁고 긴 통로를 홀로 걷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2023년, 검은 토끼의 해가 찾아왔다. 어느새 새해는 희망과 낙관이 아니라 정체 모를 두려움과 낯섦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새로운 1년이라는 시간을 또 어떻게 통과해야 할지 마음은 무겁고 답답하기만 했다. 2023년을 형상화한 검은 토끼는 어떤 그림에선 살해당하고 어떤 그림에선 정체모를 위압으로 다가온다.



그림은 조금씩 나를 깨웠다. 내가 현재를 그리고 세상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그래서 나를 드러내는 방식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결국 내 안에 있는 것을 꺼내야 했다. 설령 유치하고 부족할지라도, 그것이 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그림들은 내가 세상을 보는 창이었고, 동시에 내가 둘러쓴 가식과 가면을 인정하는 고백이었다. 나를 꺼내어 바라보는 과정. 그것이 나에게 그림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와 나를 둘러싼 무수한 경계선들을 보았다. 남들이 쫓는 욕망을 따라가는 모습. 순간의 자극들에 반응하면서도 그럴듯한 가식으로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모습.



어느 그림 속 나는 외롭고, 어색하고, 고립되있다. 잘못 끼워진 단추 같고, 답답한 양말을 뚫고 나온 엄지 발가락 같다. 그러나 한편으론 가쁜 숨소리를 내며 끊임없이 SOS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도대체 이 감옥을 나가는 방법을 모르겠다고.



어느날 어린 왕자가 그의 별로 돌아가는 장면을 그렸다. 고요한 사막 위, 조용히 사라진 모습. 나는 이 장면을 오래 바라보았다. 우물은 어두운 나의 내면이었고, 뱀은 죽음의 상징이었다. 여우는 나에 대한 연민이었을까.

어린 왕자는 육체를 두고 별로 돌아갔다. 죽음처럼 보였지만, 고통과 번민의 무한 고리를 끊는 하나의 은유였는지도 모른다. 나 역시 나를 갉아먹던 구조와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것은 소멸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해체였다. 새롭게 태어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2025년, 뱀의 해가 되었다. 겉으로 달라진 건 없었지만, 내 마음은 조용히 방향을 틀고 있었다. 이제는 새해의 건너편을 조금은 기대해도 좋을 것 같았다. 계단 위, 빛을 등진 뱀사나이는 어쩌면 나 자신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를 변화시켜 줄 사건들과 방향의 총체인지도 모른다. 밝은 빛 너머에는 조심스럽지만 분명한 무언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나는 이제, 망설이면서도, 그 계단을 올라가 봐도 좋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