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없다

벡터리스로 돌려봐

by 김정민

오랫동안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말이 있다. “길은 없다.” 노랫말인지, 싯구였는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 이 말은 나 안에서 맥락 없이 불쑥 떠오르곤 한다. 버스정류장에서, 집 앞에서 , 카페에서... 오래된 습관처럼 툭 튀어나오는 이 말을 입안에서 머금다가, 문득 제자리만 맴도는 지금의 내 상황을 가리키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의미있는 삶, 후회하지 않을 인생, 온전히 나를 뛰어들게 할 무언가를 기다리다 지나간 시간들 뒤에서 난 이제 길은 없다고 말하고있는 것이다.


서동수의 「언캐니 한 것들의 목소리」 마지막 장에서는 지진, 쓰나미 등의 재난 상황이 일본 사회에서 어떻게 ‘전통적 회귀’의 서사로 이용되는지를 이야기한다. ‘재난의 충격을 이용해 변화의 욕망을 억누르고 오히려 체제 지향적인 인간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육원처럼 폐쇄적이고 촘촘한 일본의 사회망은 구성원들을 마치 어른이 아닌, 유아적 심리 상태에 머무르게 한다고 지적한다. 그 대목을 읽으며, 갑자기 불쾌한 자각이 밀려왔다.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건 아닐까. 같은 직장, 좁은 인간관계 무엇보다 정체된 나 자신. 새로운 길을 두드리기보다 불만족스러운 현실에 안주하고, 과거의 장면을 되감으며 익숙한 위안을 반복하는 습관. 너무 많은 경계를 의식하는 내 안의 주저함과 두려움. 책 속 그들을 비판하며 읽고 있었지만, 어느새 거울 속 내 모습과 겹쳐졌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런 문장으로 책을 시작한 적이 있다. “완벽한 문장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듯 말이야.” 처음 읽었을 때 광고카피처럼 캐치했던 이 문장은 오히려 지금의 나에게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완벽한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의도나 의지대로 흘러가는 인생은 없다. 「댄스댄스댄스」에서 하루키가 말하듯, 춤을 추듯 삶을 즐기며 서툴지만 확실한 스텝을 밟는 것은 어떨까. 어둠 속에서 피아(彼我)가 불확실한 채 좀처럼 나아가지 못하는 나에게 철학자의 문장이나 자본주의 전도사들의 책 제목보다 이 말은 내게 더 진한 용기를 준다.


오래전 새벽 잠결에 이상한 말을 한 적이 있다. “벡터리스로 돌려봐.” 그 말이 왜 불쑥 튀어나왔는지 당시에는 알 수 없었지만, 어리둥절했던 그 순간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뚜렷하다. 업무에서 간혹 쓰는 말이긴 했지만 새벽 잠결의 발화는 어떤 계시처럼 다가왔다. 벡터리스(vector-less), 그것은 아마도 ‘결정된 입력이 아닌, 우발적 가능성 속에서 다시 구동하라.’고 내 무의식이 나에게 전달한 긴급한 메시지였는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길은 없다’는 말은 선언이 아니라 상태다. 내가 걸어온 방향이 어딘지 모를 뿐, 여전히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사실까지 부정하진 않는다. 완벽한 문장은 없고, 완벽한 절망도 없다면 그저 약간 비틀린 채, 흔들리며 다시 움직이는 수밖에. 어쩌면 벡터리스로 산다는 건 남이 정해 준 박자 대신, 몸이 기억하는 리듬에 맞춰 스텝을 밟는 것일지 모른다. 그렇게 흔들리면서 계속 춤을 추는 것. 목표 지점(vector)을 입력하지 않은 채, 매 순간의 우연과 오류를 새로운 경로로 받아들이며 구동하는 것. 정해진 길 위에서 넘어지지 않는 완벽한 걸음이 아니라, 길 없는 곳에서 비틀거리는 걸음 자체를 나의 유일한 궤적으로 인정하는 것. 그렇게 예측 불가능한 궤적을 그리며 나아가는 것. 그것이 나의 길이 없는 벡터리스 인생이 되어야 할 것이다.